유학(儒學)
-수천 년 동안 공인된 성현의 학문
진(秦)나라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이후 참담한 몰락이 없었다면 한나라는 유가학설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공자가 죽은 지 300년이 안 되어 건국한 한나라는 유가체계와 지존(至尊)으로서 공자의 지위를 인정하였다. 이때부터 학자들은 공자가 전해준 성현의 서적을 읽은 것이었고, 송나라 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현의 서적을 오경이라고 하는데, <시경> <서경> <예경> <역경> <춘추>를 의미한다.
고대 중국은 시가의 왕국이기도 하여 , 어디서나 시를 짓지 못하면 자격을 갖춘 문화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은 시를 읊을 줄 알아야 했다. 오경 가운데 <시경>은 바로 중국 최초의 시집이었다.
역대왕조의 고상한 선비들은 학문에 뜻을 둔 사람으로서 성현의 서적에 담긴 치국평천하의 가르침을 외우는 한편 시상(詩想)으로써 아름다운 강산을 바라보며 찬미했다. 네 가지 성조로 이루어진 한자는 함축적이고 의미심장한 시를 짓기에 가장 적합한 문자라고 할 수 있다.
시는 고문보다 외우기 쉬운데다 언어와 문자가 지닌 지혜와 정취를 잘 발휘할 수 있는 분야였고 , 그리하여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었다.고대에 시를 잘 짓는 신동들이 적잖게 나왔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시는 정식의 학문과 달리 영원히 여가로 즐기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학이었다. 유학은 한나라 때부터 송나라 때까지 수많은 문인들이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다섯 유가경전을 연구하여 주석을 달았다. 그리하여 경전에 대한 주석서의 글자 수가 경전 자체의 글자 수보다 10만 배를 넘을 정도로 늘어났다.
유학대가들은 그들의 유가경전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과 관심을 지니면서 여러 학파를 형성했다. 남송 때는 새로운 유학의 체계인 이학(理學, 도학(道學)이라고도 함)이 등장했다. 이학은 글자 자체만을 가지고 유가 경전을 해석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더 많은 설명을 첨가했고 선종과 노자의 도교에 담긴 사상체계의 일부를 흡수했다. 이학의 종사(宗師)는 남송 때의 주희(朱熹)였다 주희 이후 유가경전을 배우는 선비는 대부분 주희의 해석을 존중했다.
-유학의 근본이 되는 사서
송나라 때부터 사람들은 공자. 맹자 등 성현들의 서적을 사서오경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사서는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을 가르키고, 그중에 <대학> <중용>은 예기로부터 한 장씩 떼어내 만든 것이다.
선비들이 오경을 공부하기 전에 <예기>의 대학편과 중용편및 공자의 어록인 <논어>와 맹자의 언행록인 <맹자>를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삼았다. 그것은 고대 수천 년 동안 줄곧 인정돼온 가장 가치 있는 문화체계였다. 조정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시골의 농부도 국정을 주관하는 임금도 사서오경에 회의를 품거나 경시하지 않았다.
유년기 소학 학습과정에서 가장 먼저 접하는 유가경전은 <효경>이었다. <효경>은 분량이 적고 유가경전 중에서 초보적인 책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효는 공자 이후 가장 기본적인 사람됨의 덕목이었다.
<효경>을 익힌 다음에는 <논어>를 배우게 된다. <논어>는 상대적으로 다른 유가 경전에 비해 가장 많은 대화를 담고 있으며 쉬운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내용은 의미심장하다. <논어>를 배운 뒤에는 <중용> <대학> <맹자> 등을 공부해나가는데, 열대여섯 살이 되면 오경을 배우기 시작하여 먼저 <시경>을 배우고 나서 <상서> <역경> <춘추> 등을 차례로 학습한다.
고대에는 공부를 마친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평생학습을 중시했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그 누구나 유가경전을 배우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이 있을 수 없었고, "배우고 늘 그것을 익혔다." 뿐만 아니라 배움을 사람으로서의 도리나 행위와 결합하여 매일 성현의 책에 나오는 교훈과 대조하여 자신을 세 번 반성했다. 이처럼 배우고 익히며 반성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자격을 갖춘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신분의 차이가 없었다.
屯屈齋 書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