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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암(鷹巖) 신지효(申之孝)

둔굴재 2011. 2. 11. 21:13

 

응암 신지효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들이 의성 땅에 도착하여 낙동강을 건너기 전에 양민을 학살함이 극악무도하였다. 임진년 5월 의성 아주신씨 신지효(申之孝,  1561~1592)는 한집의 서른 두 살의 장자로 늙은 계모 오씨외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인솔하여 마을 뒷산 샘골 매바위(鷹巖) 굴로 숨어들었다. 바위 굴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데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왜적이 쫓아오는지라 왜적을 따돌리기 위하여 동굴 밖으로 나와 왜적을 유인하였더니 칼로 왼쪽 배를 쳐서 피가 흔건히 흐르는지라 목숨이 끊어질 때 칡을 입으로 씹어 붓을 만들어 혈서로 옷소매에 써서 선성현령(宣城縣令)으로 있는 동생 지제(之弟 1562~1624)에게 주기를 “나의 몸가짐이 주밀(綢密)하지 못하고 효성이 없음이 이보다 더할 수가 있겠는가? 늙은 부모는 여러 아우들이 있어 모시고 있거니와 군은 이미 몸을 왕실에 맡긴지라, 수령의 직분이 있는 터이니 마땅히 난에 임하여 임금의 명을 받들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죽음에 나갈 것이며, 내 시체를 찾지 못할 까 걱정하여 다행히 발바닥에 선성(宣城) 두 글자를 써서 알도록 하였노라.” 하였다.

이런 사실을 공의 후손 신체인(申體)仁은 선조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 오늘에 전하고 있다.

                                                                                                                         

 

                            <응암실적(鷹巖實蹟)> 초판본과 중간본. 둔굴재 소장.

                           응암의 종가 (의성 도리원)

 

                                                 응암의 현손 신천핵(申天翮)의 주정당 편액

 

                          주정당에서 구술하는 신동필(申東弼)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