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유서주(皆有書廚)
개유서주(皆有書廚) 81*34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서루'란 뜻의 편액으로 방대한 서책을 소장한 서재를 말한다.조선의 정조는 규장각의 부속 서재로 중국 도서를 보관하는 개유와(皆有窩)라는 서고를 만든 적이 있다.
글방을 말하는 용어는 여러 가지가 있다. 공벽(孔壁), 규실(奎室), 규한(奎翰), 규장(奎章), 규벽(奎壁), 난대(蘭臺), 노벽(魯壁), 대유(大酉), 동벽(東壁), 서굴(書窟), 서관(書館), 서급(書笈), 서록(書簏), 서루(書樓), 서림(書林), 서방(書房), 서사(書肆), 서소(書巢), 서실(書室), 서와(書窩), 서옥(書屋), 서장(書藏), 서재(書齋), 서주(書廚), 서포(書圃), 소유(小酉), 운각(芸閣), 운창(芸窓), 이유(二酉) 등이 모두 서재를 말한다.
명나라의 모진(毛晉, 1599~1659)은 급고각(汲古閣)에 8만 4천여 책을 장서하였고, 청 말의 4대 장서루에는 구소기(瞿紹基)와 구용(瞿鏞)의 철금동검루(鐵琴銅劒樓)와 양이증(楊以增)의 해원각(海源閣), 정병(丁丙)의 팔천권루(八千券樓), 육심원(陸心源)의 벽송당(皕宋堂)은 아버지와 아들 손자 이상의 세대를 이어서 장서하고 수집하였다. 중국 근대 장서가로는 원세개와 조선의 김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 난 원극문(袁克文)도 유명한 장서가로 '벽송서장(皕宋書藏)'이라는 장서루를 가지고 책을 수집하였다. 장서루 이름에 송판본 이백본을 수장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고려의 26대 충선왕은 원나라의 수도 연경에 만권당(萬券堂)을 짓고 수 많은 서적을 수집한 다음 고려에서 이제현 등과 원나라의 조맹부 등의 학자를 초빙하여 학문을 연구하였다. 고려의 조맹부 서체가 유행한 이유는 충선왕의 만권당 때문이다. 1320년 모함을 받아 티벳(吐番)으로 유배 간 일도 있다.
수성 빈씨의 시조 빈우광(賓于光)은 공자의 문인 빈모가(賓牟賈)의 후손이다. 원나라 인종 조정에서 연우 원년(1314) 한림학사가 되었으며 송나라 비각(秘閣)에 소장되어 있던 서적 17,000권을 우리나라로 가져와 정학을 밝게 창도한 공로가 사문(斯文)에 있다. 이에 고려 충숙왕이 수성군(壽城君)으로 식읍을 내렸다. 필법도 당대에 뛰어났다.
둔굴재 공벽(孔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