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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효원과 소파 여사시집(小 坡女士詩集)

둔굴재 2011. 4. 20. 14:02

 『소파여사시집』은 개화기 여성 오효원(吳孝媛, 1889~?) 의 시집이다. 본관은 해주이지만 출생지 의성에서는 의성 오씨라 할 정도로 명망이 있는 집안이다. 고려의 경상도 안렴사 오국화(吳國華, 1427~1547)는 경상도 공무 수행 중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삼일 간 통곡하다가 관인(官印)을 땅에 묻고 문소(聞韶)의 금성산(錦城山)에 숨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뒤 그의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몇 번이나 불렀으나 그 때마다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 하며 냇물에 나가 귀를 씻었다. 후인들이 이 냇물을 세이천(洗耳川)이라 하였다. 줄여서 세천이란 지명으로 남아있다.

 오효원의 처음의 이름은 덕원(德媛)이고, 호는 소파(小坡), 수구(隨鷗)이다. 아버지는 몽금옹(夢今翁)이라 자호하는 오시선(吳時善)이고, 9세부터 남자복장을 하고 사숙에 다녀 얼마 안가 시를 지을 줄 알았다.1989년 11세 때에는 의성과 이웃 두 고을에서 실시하는 백일장에서 수방(首榜)을 차지하였다.

 1902년 14세 때 공금유용의 죄로 수감된 아버지의 죄를 용서 받고자 홀로 상경하여 당시의 세력가인 선원 김상용의 종손 유하(游霞) 김종한(金宗漢), 석운(石雲) 박기양(朴箕陽)과는 부녀관계를, 민영선(閔泳璇)과는 사제지간의 의리를 맺으면서 아버지를 구한다.

 이때부터 사회에 출입하기 시작하여 구로회(九老會) 시회에도 출입한다. 구로회에는 해사9海士) 김성근(金聲根), 유하(遊霞) 김종한(金宗漢), 주정(柱庭) 민영환(閔泳煥),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금래(琴來) 민영소(閔泳韶), 석운(石雲) 박기양(朴箕陽), 판서(判書) 이건하(李乾夏), 시남(詩南) 민병석(閔丙奭), 하정(荷亭) 여규형(呂圭亨)이 참가하여 서울 삼청동에서 시로써 총애를 받기도 한다. 이 외에도 동농 김가진댁시회, 일당 이완용댁시회 등에도 참석한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도 접근하여 그 소개장을 가지고 1908년 20세에 조선에 여학교가 하나도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명신여학교를 건립한다고 일본으로 건너가 사교계에 어울리면서 학교건립기부금 몇 천 만원을 모금하여 돌아온다.

24세 때 동경에서 있던 한국공사대리 신해영(申海永)과 약혼하였으나 혼인 직전 신해영이 죽었다. 그 후 4년간 명신(明新), 숭신(崇信), 공옥(攻玉) 여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16년 28세 때 중국에 들어가면서 평양 기자릉, 연광정, 심양효종대왕의 옛일, 심양의 삼학사, 만리장성, 백이숙제비, 연경회고, 만수산에서 서태후 생각, 멱라강에서 굴원을 슬퍼하다 등의 시가 있으며 특히 당시의 여성으로서 곡부의 공자묘를 배알했다는 것이 특이하다. 상해에서는《신신보사(申新報社)》에 시와 글을 게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천진신문사 기자 미록(味麓) 모상주(毛祥澍), 양계초(梁啓超) 등의 명사들과 교제하였으며, 특별하게 위안스카이(袁世愷, 1859~1916)의 차자 극문(克文), 오자 극권(克權)과 시중 남호(南湖) 염천(廉泉)과 아내 오지영(吳芝英), 비서관 소봉(小峰) 김남헌(金南獻)과 교유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에 북양대신 파견원 신분으로 조선에 있으면서 조선왕비의 여동생인 김씨와 혼인하면서 시집갈 때 두명의 시녀 이씨와 오씨를 데리고 갔다. 위안스카이는 첩은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으로 3명의 여자를 모두 첩으로 삼았다. 그리고 3명을 나이 순서에 따라 이씨를 두 번째, 김씨를 세 번째, 오씨를 네 번째로 삼았다. 김씨 부인이 낳은 차자 극문과 이씨 부인이 낳은 오자 극권과 교유하였다.

 소파여사와 원극문(1890~1931)은 년령 차이가 없었으며, 그는 중국 근대의 장서가로서 “벽송서장(皕宋書藏)”이란 서재를 경영하여 송판본 200책을 장서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원극문의 아들 원가류(袁家留, 1912~2003)는 미국에서 물리학을 공부하여 오건웅(吳健雄, 1912~1997)과 결혼하여 부부 모두가 물리학의 대학자이다.

 

 1918년 북경에 있던 윤명은(尹命殷)과 혼인하여, 1919년 31세에 중국 여행을 마치고 정부관광단과 함께 배를 타고 귀국하고는 6년간 병든 몸으로 요양하며 기독교에 입문하여 세례를 받았다. 1929년에 그의 청으로 아버지가 시를 모아 서울 대동인쇄주식회사에서《소파여사시집》을 간행되었다. 시집 내용은 오언절구 79수, 칠언 절구 196수, 오언, 칠언고시 8수, 오언율시 33수, 칠언율시 118수, 그리고 소체라 하여 사1편과 가사 6편이 수록되어 있다. 죽은 년대는 확실하지 않고, 1929년의 본인 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41세 이후가 될 것이다.

 


징사 오국화의 <금산실기>, 오효원의 <소파여사시집> 1929년. 양계초의 <음빙실자유서> 둔굴재 소장


 

《소파여사시집》서문을 쓴 오지영(吳芝瑛)은 누구인가?

 

오지영은 원세개의 시중인 남호(南湖) 염천(廉泉)의 처이며 근대 여성혁명가 왕정균의 부인 추근(秋瑾, 1875년~1907년)과는 절친한 친구이다. 시문을 짓고 서예가로 이름이 알려진 오지영은 반청혁명운동에 참여하다가 모반죄로 참수형에 처해진 추근의 시신을 그녀의 의자매인 서자화(徐自華)와 체포 위험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거두어 항주 서호 근처 고산에 묻어 주었다.

 

 오지영은 동성현(桐城縣) 사람으로 동성은 동학파가 일어난 곳이다. 동성학파는 화려한 수사를 가능한 배제하고 간결 단백하면서도 절도가 있고 격조 높은 문장을 추구한다 사상적으로는 송대 유학의 정신을 지향한다. 동성학파는 증국번(曾國藩), 방동수, 마기창(馬其昶, 1855~1930) 등이다.

 

                                        소파 오해원과 석운 박기양(朴箕陽. 1856~1932)의 글씨. 32*130.  둔굴재 소장

 

 

-작품 내용-

慈悲無量佛      무량하신 부처님

按摩手中春      봄같은 손으로 어루만져주시네

衆生弘濟術      중생을 널리 구제하시는 의술은

無奈得其仁      그 어짊을 기다릴 것까지 없네.

  小坡女士

 

 

楊柳煙心樓欲雨            버드나무에 짙은 안개끼니 누각엔 비가 오려고 하고

桃花水靜岸無風            복사꽃 뜬 물은 고요하니 언덕엔 바람이 없다네.

  小坡女士書

 

 

分別二十載              분별 이십년에

常勞眷慈情              항상 자애로운 정 돌아보기를 노력한다.

對酒悲往事              오늘 술을 대하니 지난일들이 슬퍼지니

欲問少時名              젊은 때의 이름을 묻고 싶어진다.

  小坡賢媛心正 石雲七十三翁之醉髡 戊辰 小春(1928년)

 

                       유하 김종한의 간찰


<소파여사집> 의성군. 2017.


 추근(秋瑾, 1875~1907)은 근대 국민운동에 목숨을 바친 여성 혁명가로 1899년 일본에 유학하였으며, 1907년 32세로 무장봉기가 실패로 돌아가자 “혁명에는 피가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도피하지 않고 체포되어 죽음을 택했다. 그가 형장에서 남긴 절명시가 유명하다. 손문은 추근을 ‘건괵영웅(巾幗英雄)’이라고 칭호하였다.

 

秋風秋雨愁殺人(추풍추우수쇄인) 가을바람 가을비가 사람을 못 견디게 한다.


『세이토』는 1911년 창간된 여성문예잡지이다. 발기인은 히라쓰카 라이초(平塚雷鳥, 1886∼1971)이다. <세이토(靑踏)>란 구슈문학회(金葉會)의 강사였던 이쿠다 조코(生田長江)가 지어준 잡지명으로, 19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New Women운동의 여성들을 지칭한 불루 스타킹을 한자 세이토로 바꾼 데서 유래하였다. 블루스타킹의 여성들은 가부장제도의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고, 여성들의 지위향상과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세이토사의 여성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가부장제로 인해 억압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고, 여성자아의 각성과 확립에 대해서 역설하였다.

페미니즘 신여성 히라쓰카 라이초는 <세이토> 창간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 진정한 인간이었다. 지금 여성은 달이다. 타인에 의해 살아가고 타인의 빛에 의해 빛나는 병자와 같은 창백한 얼굴의 달이다.”

 오효원은 1916년 28살의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서 1918년 9월 약 2년 반가량을 중국에서 생활하였다. 중국의 여성혁명가 추근과 오지영, 일본의 신여성운동가 히라쓰카 라이초의 사상을 접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제1세대 한국근대여성 이봉선(1894∼1992), 김명순(1896~1951), 김일엽(1896~1971), 나혜석(1896~1949), 윤심덕(1897∼1926) 등이다. 1910, 20년 일본여성운동을 느끼고 체험하였다. 여기에 오효원은 이들보다 10년 정도 이른 시기의 신여성운동가였다.

 

『소파여사시집』속지에 제첨한 문장은 한 글자만 틀리고 동일하다. “가을비 가을바람에 근심스러워하는 사람(秋雨秋風愁然人 小坡書)”이라고 스스로 말한 것은 추근의 절명시를 그대로 적은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추근을 존경하였으므로 사상을 옳다고 보았을 것이다. 일본과 중국을 여행하면서 세계 신여성들의 변화를 읽고 실천하고 있었다.



                                              도랑굴(濤浪窟) 둔굴재(屯屈齋) 초부(樵夫)

 

오탁근(吳鐸根. 1921~2013)

  관향은 해주. 의성출신이다. 아호는 석원(碩園), 충헌(忠軒)이다. 경북고등학교. 일본 메이지대학 졸업.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한국가스공사 이사장 역임. 1970년 오승우와 김동권의 권유로 유화그리기 시작하였다. 1976년 대구일보 화가회 회장, 대구백화점서 개인전, 경북교육미술협회 회원전을 하였다. 저서로 그린 순서대로 175점의 <초심자의 그림일기> (1985), 83점의 <취미의 그림일기> (1991) 등이 있다.



아내의 초상


도자와 키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