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경주 박물관 토기 전시실에는 이형 토기 각종이 전시되어있다. 오리모양 토기(鴨形土器), 화덕모양 토기(竈形土器), 수레바퀴모양 토기(轉輪飾土器), 기마(騎馬)인물상 토기, 등잔모양 토기, 인물 동물모양 토기(土偶), 굽다리 항아리(臺附壺), 굽다리 접시(高杯), 손잡이 잔(把手附杯), 목 항아리(莊頸壺), 네 귀 항아리(四耳附壺), 뿔잔(角杯)등이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굽다리에 신발이 올려지고 속에 잔이 놓여있는 이형 토기가 있다. 짚신형태의 받침이 그릇 받침으로 놓이고 짚신 속에 잔이 있다. 신라 5~6세기의 이형 토기라는 짤막한 설명이 전부이다. 물이나 술을 마시는 잔을 신발로 받침을 하여 장식 한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제례용이라면, 제사는 더 없이 신성하고 엄숙하게 행하여지는데 그럴 수 있을까? 세상의 먼지와 더러운 것을 밟고 다니는 신발을 먹는 그릇의 장식으로 사용 하지는 않는다. 코끝이 살짝 치켜 올려지고 뒤쪽은 신을 때 잡을 수 있는 고리 까지 표현되어있다.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중국에 여행 갔을 때, 중국인의 책상 위에는 명함 꽂이와 필세(筆洗)가 신발 모양이었다. 백화점에는 그런 것을 많이 팔고 있었으며 심지어 목걸이도 있었다.
중국인의 집을 방문 했을 때, 이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계단 손잡이 끝 장식이 또 신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집의 주인은 오르내리면서 그 신발 장식을 쓰다듬으며 시혜(hsieh)하고 말하였다. 그 신발 장식은 얼마나 쓰다듬었는지 닳아서 반들반들 하였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벽사(辟邪)의 의미입니다. 우리 중국인은 신발을 벽사의 의미로 씁니다.’ 신발은 중국어로 ‘혜(鞋;hsieh)’라 한다. 벽사의 사(邪)도 같은 발음인 시혜(hsieh)이다. 그러므로 같은 발음은 같은 뜻으로 해석한다. 박쥐 ‘복(蝠)’을 복 ‘복(福)’으로 보는 이치이다.
더 나아가 신발이 시신(屍身)을 담는 관(棺)의 모양으로 변형 된 것은 신발의 ‘혜(鞋;hsieh)’와 ‘사(邪;hsieh)’가 시신의 ‘시(屍;shih)’와 모양이나 발음이 비슷하니 시신을 담는 ‘관(棺)’과 벼슬 ‘관(官)’이 같은 발음인 관(kuan)으로 발음 되므로 높은 벼슬에 오르게 해 달라는 기원의 의미로도 쓴다.
중국인의 같은 소리가 나는 것을 같은 뜻으로 해석하는 쌍관의(雙觀意)의 습관은 오래되었다. 사마천의 <사기> 중 항우본기는 항우(項羽)와 유방의 홍문연(鴻門宴)대목은 긴박과 스릴이 넘친다. 유방의 군대가 함양을 점령하자, 항우의 진노는 극에 달한다. 이에 항백(項伯)의 주선으로 사죄 아닌 사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함양 정벌 이후 유방의 야심을 이미 꿰뚫어본 범증(范增)은, 굽실되는 유방의 자세에 도취되어 기고만장 해있던 항우를 향해 자신이 차고 있던 옥결(玉玦)을 세 번이나 들어 보인다. 항우는 본체도 않았다. 부관 번쾌(樊噲)의 용맹과 장량(張良)의 기지로 이 날 유방은 화장실에 가는 체하고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달아날 수 있었다.
범증이 옥결을 세 번씩이나 들어 보인 것은 ‘결(玦)’은 ‘결(決)’과 음이 같으므로 어서 결단을 내려 유방을 죽이라는 신호를 한 것이다. 이 날 항우의 우유부단은 결국 뒷날 사면초가의 비극으로 끝맺고 있다.
또 하나는 한나라의 장수 이릉(李陵)이 5천의 보병으로 흉노의 본진을 유린하고 돌아오다가 사막 가운데서 흉노의 8만 기병과 장렬히 싸우다가 투항하자, 격노한 한 무제는 이릉의 어머니와 처자를 족멸하였다. 그러나 흉노의 왕은 그의 딸을 이릉의 아내로 주고 우교왕(右校王)을 삼는 등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무제가 세상을 뜨고 여덟 살 난 불능(弗陵)이 왕위에 올라 흉노와 화평 교섭이 재개되자 한나라에서는 이릉을 다시 불러 오려고 임입정(任立政)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마침내 한나라의 사신을 환영하는 흉노의 연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임입정은 어떻게 해서든 이릉에게 함께 돌아가자는 뜻을 전하려 하였지만 좀처럼 기회를 만들 수 없었다. 답답하기 그지없던 그는 다만 이릉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짓을 하며 칼의 둥근 고리 환(環)을 만질 수밖에 없었다. ‘환(環)’은 ‘환(還)’과 음이 같으니 함께 ‘돌아가자’는 뜻을 그렇게 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릉은 대장부가 어찌 두 번 욕을 당할 수 있겠느냐 함께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흉노의 땅에서 비운의 생을 마쳤다.
이렇듯 ‘결(玦)’로 ‘결(決)’을 나타내고 ‘환(環)’으로 ‘환(還)’을 전달하는 것은 한자의 동음사을 활용하여 쌍관의를 나타낸 것이다.
이 때의 신라인들은 한자의 같은 음은 같은 뜻으로 보는 쌍관의를 알고서 토기를 구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제례용 제기에 신발 모양 일수가 없다. 신성한 제사에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인 신발그릇을 사용하여 제사를 모신다. 고무신에 막걸리를 부어 마시던 적도 있었는데 이것도 이런 의미의 벽사의 변형이 은연중에 나타난 것일까?
신(鞋)은 신(神)과 같은 소리가 나니 신(神)이 다녀가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신발형 잔. 북위, 북제 시대(둔굴재 촬영)
<필원잡기>에는 신발형 토기잔이 아니라 가죽신에 술을 따라 마신 이야기가 전해온다. “문안공(文安公) 이사철(李思哲)이 친구들과 삼각산에 놀러갔었는데, 각기 술병을 찾았으나 다만 술을 따라 마실 그릇이 없었다. 이때 권사문(權斯文) 지(枝)가 새로 만든 말가죽 신을 신고 왔는데 문안공이 먼저 가죽신에 술을 따라 마시니, 다른 사람들도 차례로 마시고는 얼굴을 쳐다보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가죽신을 술잔을 삼는 것이 우리로부터 고사가 되었으니,’ 좋지 않은가. 하였다.” 우리도 언젠가 젊은 시절 호기를 부릴 때 백 고무신에 막걸리를 따라 마신 적이 있다. 이런 것 모두가 무슨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君子之國 峨洋玄關 濤浪窟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