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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하학궁

둔굴재 2011. 5. 20. 10:03
 

직하학궁(稷下學宮)

 직하학궁은 제나라의 도성인 임치성(臨淄城)의 서문인 직문에 있었다. 직문은 직산 아래 세워졌기 때문이다. 직하학궁은 제나라의 ‘지혜의 창고’로 환공(桓公) 전오(田午.기원전 374~기원전 357) 때에 창건되어 제나라가 진나라에 의해 멸망할 때의 마지막 왕인 폐왕(廢王)전건(田建.기원전 264~기원전 221) 때 까지, 모두 150년 동안 존재했다. 직하학궁을 세운 환공은, 관중을 재상으로 삼았던 환공이 아니라 전씨가 강씨를 대신한 ‘전씨 제나라’가 들어선 이후의 왕이다. 두 환공을 구별하기 위해서 통상적으로 후대의 환공을 ‘환공 오’라고 부른다. 환공 오가 앞서 있었던 환공이 일으킨 위업을 흠모해서 인지 알 수 없지만, 환공은 학궁을 세워 천하의 명사를 불러 모으고자 했던 마음만 보더라도, 그가 각별한 문화적 정치적 포부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직하학궁을 세워 사상과 학술의 기초를 다져놓았기 때문에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위왕(威王)과 선왕(宣王)의 성세’가 가능했다. 제나라의 역사는 직하가 흥하자 국운이 흥하고 직하가 쇠하자 국세가 위험했으며, 직하가 멸하자 제나라도 끝이 났다고 말할 수 있다.

 

                                      임치의 직하학궁유지

 

                                        직하학궁유지의 끝없이 펼쳐진 밀밭

 

 

『사기』의「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에서는 제나라는 일찍이 직하에 학궁을 세워 문학, 유세의 선비를 초빙하여 학문을 강론하고 논의하게 하였다. 직하학궁에는 이름난 학자와 문학가들이 모여 들었으며 그 수가 수천에 달했다. 익살스럽고 재미있었던 순우곤(淳于髡), 웅변을 쏟아내던 맹자, 타고난 변론의 귀재 전병(田騈), 그리고 추연(鄒衍), 순자(荀子), 송견, 신도(愼到), 환연(環淵), 왕두(王斗), 안촉(顔斶), 예열(예說), 전파(田巴), 계진(季眞), 접자(接子), 윤문(尹文), 노중련(魯仲連) 등 상대부에 속하는 사람만 해도 76명이 되었다. 이들은 굉장히 후한 대우를 받았다. 대저택에 살았고, 외출할 때는 호화로운 수레를 이용하였다. 맹자는 직하학궁에서도 특히 존중을 받는 인물이다. 『맹자』에 제나라 선왕과 정사를 토론하는 대목이 17군데나 나온다. 맹자의 경우 외출 할 때 에 언제나 사오십대의 수레가 뒤를 따랐다고 한다.

사마광(司馬光)

이 「직하부(稷下賦)」에서 “천리 안팎의 뛰어난 선비들을 불러 모으고 백가의 위대한 학설을 총괄하네”라고 말한 것과 같다.

학궁 안에서는 언제나 창과 화살이 오가듯 격렬한 논쟁이 펼쳐졌으며 변론의 풍조가 비할 데 없이 성대했다.

전파(田巴)는 변론가는 변론을 통하여 하루에 1000명이나 설복할 수 있었다. 분명한 논리와 거침없는 언변을 지닌 이가 1000명에 달하는 사내 대장부들을 차례대로 논쟁에 참여하게 만들었던 광경을 상상할 수 있다.

제나라 조정에서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황로지학(黃老之學:도가)이었기 때문에 직하학궁에서 제1학문이 되었다. 그렇다고 황로지학의 학자들이 더 많은 영예를 누리고 높은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다. 나중에 ‘좨주’ 자리에 세 번씩이나 올라 직하학궁에서 ‘스승 중의 스승’이 된 순자는 황로학자가 아니라 유가의 집대성자이며, 그의 제자인 한비자는 법가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 학궁의 제자들은 관직을 맡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언론에 책임을 질 이유가 없었다. “직책을 맡지 않았으나 국사를 논의 했고(不任職而論國事)”, “직무를 맡지 않았으나 정무를 의논하였으며(不治而議論)”, “관직을 맡아 지킬 것이 없었으니 언론에 책임질 것이 없었다.(武官守 無言責)”, 직하 선생의 임무는 명확했는데, ‘다스리지 않되 논의하는 것’이었다. 각자 대담하게 마음껏 말하고 저마다 글을 통해 학설을 내놓아야 했다. 이렇게 해서 직하학궁은 그 시대의 가장 크고 가장 심오한 두뇌집단이자 문화교류의 중심이 되었다.

 

직하하궁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폐쇄되고 만다. 곧이어 진시황의 분서갱유, 문화 전체주의를 위한 열악한 선례를 남기게 되며, 다시 백년후 한무제가 “백가를 몰아내고 오로지 유술로만 존숭한다(罷黜百家 獨尊儒術)”고하여 일견 ‘백가쟁명’의 더 이상 연속되기 힘들어졌다.

 

                                      직하학궁유지에서

 

 

 

                       임치의 직하로

 

⁃ 산동성 사람들

순우곤(淳于髡):

동방삭(東方朔): 제나라 서북쪽 연해지역사람. 민담예술의 비조. 거지들의 신.

추연(鄒衍): 제나라 귀족 집안 출신. 대구주설 음양오행 토대로한 자연학설의 이론의 틀 제시.

편작(扁鵲): 제나라 왕 네 차례 진료. 맥의 이치만을 중시.

피부아래, 혈맥, 위와 장에, 골수.

양해(梁楷, 1140~1210): 남송시대의 화가. 호는 양풍자(梁風子). 산동성 동평현생. 대표작품으로 발묵선인(潑墨仙人)이 있다.

포송령(蒲松齡. 1640~1715): 산동성 치박에 포송령의 옛집이 있다.

구처기(丘處機): 교동 반도출신. 원나라 때 도가의 대표 인물.

왕의영(王懿榮): 등주 사람. 갑골문 발견. 국자감좨주.

조설근(曹雪芹): 홍루몽 저자.

 

 

                                                    근역사문  둔굴재  磻溪寓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