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안 검암(儉巖)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걸어간다.
의성 비안 검암은 1758년 편찬된 <비안여지승람>에 “현남쪽 수리(數里)에 있다”고 하였으며, <교남지> 비안현조에 “검암은 군에서 남으로 1리에 있다”고 하였다. 옛날 걸어 다니던 시절 의성과 군위에서 비안현으로 가는 관리나 나그네는 검암산(儉巖山) 밑으로 위천(渭川)을 따라 걸었다. 나른하게 걸으면서 비안현청이 보이는 검암 바위 아래서 평야를 굽이 돌아가는 맑은 강을 보면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검암산>. 검암은 도로 절개지의 두번째 교통 표지판 위에 있다.
지암 김재경의 <검암중각기>에 의하면 ‘병산현구(屛山縣口)’ 4자와 ‘검암(儉巖)’ 2자가 위천이 흐르는 검암산 바위벼랑 면에 큰 글자로 각석한 되어 있다. 큰 글자로 ‘검암’이라고 각석된 윗면 조금 높은 곳에 작은 글자로 16자가 ‘사치하면 이지러지기 쉽고, 검소하면 기울지 않는다. 앉아 쉬는 사람이나 길 지나가는 사람이나 이 바위에 새긴 것을 보시라. (奢則己虧 儉故不傾 坐者行者 視此巖名)’고 각석되어 있다.
그 서법이 진실로 명필이다. 어느 때의 일인지 누구의 글씨인지를 알지 못한다. 오늘날 불행하게도 도로공사로 훼손되어 옛날의 고졸한 서법을 볼 수가 없어 슬프고 몹시 애석한 일이다. 서법은 이미 없어지고 새긴 말씀만이 입으로 외우고 귀로 들어서 전해진다. 만약에 사람들로 하여금 바위에 각석하여 드러내지 않으면 눈으로 보고 마음을 경계하는 마음이 진실로 끊어지게 될 것이다. 옛사람의 근검하고 부지런함 또한 연기와 같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에 검암을 좋아하는 여러 군자들과 추가로 각석할 것을 도모하였다.
이에 지암 김재경은 <검암중각통문>을 지어 발송하여 홍재겸(洪在謙) 등 뜻있는 선비를 모아 1917년 16자를 중각하였다. 그 후『검암중각계첩』을 만들어 기록으로도 남겼다.『검암중각계첩』에는 김재경이 <검암중각기서>하고, 홍재겸이 <검암중각기>를 썼다. 검암중각동심계원은 김재겸 등 의성, 비안, 군위, 신령의 선비 82명의 동심계원이 있다. 특별이 신령(新寧) 화성동에 사는 16살의 소년 이규성(李圭晟)의 이름도 올라 있다.
검암명사(儉巖銘辭)의 전고는『논어』술이편이라 생각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치하면 공손하지 못하고 검소하면 고루하니, 공손하지 못한 것보다는 차라리 고루한 것이 낫다. (子曰 奢則不孫 儉則固 與其不孫也 寧固)”고 하였다.
이와 함께 검암명 옆에는 <임리재 권도겸 실행명>이 각자되어 있다. 이 실행명은 영해에 사는 독지가 임리재 권도겸이 독성재(獨醒齋) 김치명(金致明. 1812~1878)이 아버지(諱振琥)의 병환에 매일 밤 정화수를 떠 놓고 빌고, 어머니 경주김씨의 종기를 빨아 낳게 한 효행에 감동하여 금 일백 냥을 주어 도움이 되게 하였다. 이 사실을 마음에 새겼다가 사적을 송덕하여 그 뜻에 보답하고자 돌에 새겼다. 바위의 각자내용은 아래와 같다.
<임리재 권도겸 실행명>
본관은 안동으로 영해에 살며 관직은 부정(副正)이며 명(銘)은 실행록에 있으며, 신축년(1841)에 처음 각자하였으며 신유년(1861)에 중각하였다.
(臨履齋權公度謙實行銘
本安東居寧海官副正銘在實行錄辛丑始刻後再辛酉重刻)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이면승이 주청한 <임리재 권도겸 실행>에 보면 공은 1829년 경상도에 기근이 발생하자 영해 유학 권도겸이 두 번에 걸쳐 많은 재산을 진휼기금으로 바치자 경상도 감사 이면승(李勉昇)이 논상(論賞)을 주청하였고 1841년 비안현감 김노상(金老商)이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 서류는 코베이 2009년 6월 20일 114회 삶의 흔적 경매전에 나온 적이 있다.
또 하나, 둔굴재 소장 본 명문은 <임리재 권도겸 실행>은 1841년 비안현감 김노상(金老商, 1787~1845)이 짓고 비안현 검암소(儉巖所)가 명을 지었다. 경상도관찰사 정기선(鄭基善, 1784~1839)이 진휼에 필요한 물자를 획급하도록 묘당에서 품처하게 해 달라고 하였다.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에 진주목사 정사(鄭賜)의 산소 아래에 순상정공기선거사비(巡相鄭公基善去思碑)가 철비로 세워져 있다.
김노상의 자는 명부(明府), 호는 지수(芝叟), 본관은 월성. 정언(正言) 도원(圖遠)의 아들. 1828년 의관겸비장(醫官兼裨將))으로 북경에 갔던 김노상(金老商)은『부연일기(赴燕日記)』을 작성하였다. 헌종 6년 경자(1840)에 비안현감으로 부임하여 신축년(1841) <임리재 권도겸 실행>을 작성하였다. 백동혁(白東赫)편저『彛齋先生實紀』에서 “<學儒術如今賴不疎>을 ‘後學前縣監月城金老商’이 작성하였다.” 하였다.
<검암명>과 <임리재 권도겸 실행명>은 검암산 바위 벼랑아래 위천이 흐르는 곳에 있다. 저 멀리 비안현청이 보이는 아름다운 곳으로 길가는 나그네에게 이정표 역할도 하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검암의 사치함을 경계하고 검소하게 생활할 것을 계몽하고, 임리재 권도겸의 선행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비안 선비들이 사치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검소하자는 운동을 펼쳤다. 비안현청으로 오가는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바위 벼랑에 각석하여 볼 수 있게 하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문서로도 남겼다.
지금은 신작로가 생기면서 비안현청이 길가로 옮겨졌다. 옛길로는 다닐 일이 적어지고 검암 석각은 덤불 속에 묻혀서 찾기도 어렵다. 어쩌다가 옛 것을 좋아하는 자만이 어렵게 찾아온다.
김재경의 <지암유고>
홍재겸의 <정산선생문집>
송홍운의 <부해집>
<검암중각계첩>. 1917. 19*27.5cm. 둔굴재.
<검암중각동심계안>
<임리재 권도겸 실행> 115 * 47 cm. 둔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