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극문(袁克文)의 벽송서장(皕宋書藏)
원극문(袁克文. 1890~1931)의 벽송서장을 이야기하려면 원극문의 출생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 원세개의 처첩이 10여명이었는데 아들이 16명이었다. 아들은 모두 “극(克)”자를 균등하게 넣어서 이름을 지었다. 극문은 아들로서 서열이 두 번째이다.
원세개는 청나라 말 조선에 머물면서 조선 여인 김씨와 결혼한다. 김씨는 이씨와 오씨의 시녀을 데리고 간다. 그러나 원세개에게는 우씨(于氏)라는 정실의 여인이 있었으며, 조선에서 데리고 온 김씨와 시녀들도 모두 나이 순서에 따라 첩실로 삼았으니 이씨는 두 번째, 김씨는 세 번째, 오씨는 네 번째가 되었다. 김씨는 귀족집안 출신으로 정실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시집가자말자 따라온 시녀들과 함께 첩이 되어 매우 우울하게 지냈다. 그녀는 5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둘째가 극문(克文)이고, 셋째가 극량(克良)이고 딸 셋을 두었다. 졸지에 지위가 격상 된 이씨는 6명의 자녀를 두었고, 오씨는 4명의 자녀를 두었다. 원세개는 맏아들 극정(克定)은 장애가 있고 둘째 극문이 맏아들 노릇을 하여야 하는데 글만 좋아한다고 했다.
원극문의 자는 표잠(豹岑)이고 호는 한운(寒雲)으로 아들 원가류(袁家留. 1912~2003)는 미국에서 물리학을 공부하여 최초의 고속가속기실험자가 되었고, 부인 오건웅(吳健雄)은 세계적인 핵물리학자가 되었다. 원극문의 책 수집은 황태자의 신분으로써 막대한 경제력이 바탕이 되었으며 청대의 저명한 장서가 황비열(黃丕烈)이 송판본 일백종을 수집하겠다는 의지로 장서루를 백송일전(百宋一廛)이라 하였는데 원극문은 이보다 배가 되는 이백종의 송판본을 수집하겠다는 뜻으로 벽송서장(皕宋書藏)이라 하였다. 팔경각(八經閣)에는 송건상본 <주역>, <상서>, <모시>, 예기>, <주역>, <효경>, <논어>, <맹자>등의 팔부 경서류을 보관하였으며, 송각본 <어현기집(魚玄機集)>이 특히 유명하며 지금은 북경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다. 원극문의 장서는 대략 원세개 사후 오래지 않아서 흩어진다.
원극문의 벽송서장 장서인
1, 皕宋書藏主人卄九歲小景 2,上第二子, 5, 寒雲主人, 6, 抱存, 7, 抱道人.
원극문의 부인 유씨(劉氏)는 자가 매진(梅眞), 안휘성 귀지현인(貴池縣人)이다. 작은 해서를 잘 썼으며 시읊기를 마음데로 하였다. 작품으로 <권수사(倦繡詞)>가 있다. 항상 극문과 더불어 서로 시를 주고받았으며, 당시의 사람들은 조명성(趙明誠)과 이청조(李淸照)에 비견하였다.
나이로 한 살 차이나는 조선의 소파 오효원(吳孝媛. 1889~?)이 원극문에게 화답한 시가 전하여 소개한다.
和寒雲袁公子 한운 원극문에게 화답하다
楊花如雪向人飛 버들솜꽃이 눈같이 사람에게 날아들고
過盡東風客未歸 봄바람이 다 가도록 나그네는 돌아가지 못하네
節物傷心徒黯黯 계절은 바뀌는데 모든 것이 어두워 마음이 아파
鄕園入夢謾依依 고향 동산이 아련하게 꿈에 보이네
書生貧橐詩情冷 서생은 주머니가 비니 시 쓰고 싶은 마음도 썰렁하고
公子淸遊俗事稀 한운 원공자의 고상한 놀이에는 세속의 일이 드물어
賴有天涯憐我病 하늘 끝에서도 나의 병을 가련하게 여기어
良辰一笑亦何非 좋은 날 한번 웃는다고 어찌 안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