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이세일고(安東金氏二世逸稿)
金祐鎭[1897~1926]編. - 鉛活字本. - 1923.
4卷 1冊: 26.2⨯19.3cm. - 東裝. - 四周雙邊.
半郭: 21.7⨯15cm. 有界. 13行 28字. 註雙行, 上黑魚尾.
序; 乙卯(1915)...金漢穆)
跋: 癸亥(1923)...金祐鎭. 哲鎭[不肖後孫... 全羅南道 木浦 成趣園]
뇌서집(磊棲集)
金炳昱(1808-1885)著. - 鉛活字本. 全南 成趣園 - 1923
6卷2冊 : 四周單邊 半郭 21.7 ×14.9 cm, 13行28字
注雙行, 上黑魚尾 ; 26.5 ×19.3 cm
序: 乙卯(1915)...鄭鳳鉉, 乙卯(1915)...金漢穆.
跋: 癸亥(1923)...金祐鎭, 哲鎭...全南 木浦 成趣園.
<안동김씨이세일고>는 당옹(塘翁) 김계순(金繼淳. 1752~1836)과 파지와(怕知窩) 김석근(金석根. 1791~1872)의 2세 문집으로 손자 김성규(金星圭)가 모아서 기록한 것이다. <안동김씨이세일고>의 제첨은 김우진이 하였다.
김계순의 처음이름은 조경(祖慶), 자는 이술(而述)이고 호는 당옹(塘翁)이며 안동인이다.
김석근의 처음이름은 석근(石根), 자는 사운(士雲)이고 호는 파지와(怕知窩), 취균재(醉筠齋)이며 안동인이다.
김병욱(金炳昱, 1808-1885)
김병욱의 자는 문거(文擧), 호는 뇌서(磊棲). 본관은 안동이다. 아호 뇌서는 문경 가은 입향조 6대조 만은공 계원(啓源)이 처음 터전을 잡아 입향은 곳으로 ‘서들’ 또는 ‘서들재’를 한문으로 적은 것이다. 서들(石들, 돌밭?)은 문경지역의 방언으로 ‘돌무더기’란 뜻이다. 이는 근본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손자 호진(灝鎭)이 적은 뇌서부군가장(家狀)에 의하면 “동포리(東浦里)에서 태어났다”고하였다. 동포리는 문경현 동쪽 포구이다. 지리적 방향으로는 서쪽이지만 문경현의 오른쪽이기 때문에 예절의 방향으로는 동쪽이 된다.
아버지는 김석근, 할아버지는 당옹 김계순은 평생 검약측은을 상서롭게 여겼고, 아버지 파지와 김석근은 영릉참봉에 천거되어 돈영부도정에 임명되었다. 어머니는 문희전씨(聞喜錢氏) 도석(道碩)의 딸이다. 문희는 고려 때 문경의 고지명이다.
문희전씨 시조 전유겸(錢愉謙)은 원나라 용도각직학사를 지냈으며, 1351년(공민왕 1)에 노국대장공주를 배행하고 고려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평장사가 되어 최영 장군의 누이와 결혼하여 개경 천장교(天章橋) 옆에 정착하였다. 벼슬은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며,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호군으로 최영 장군이 피살되고 고려가 망하자 이에 항거하다가 관산(冠山)에 유배되어 조령산 남쪽에 살았다.
조선 정조, 순조 때 전도석은 문경의 부호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에 올랐다. 일성록에 의하면 문경현의 큰 폐단이었던 화전세 납부문제를 해결하고 1810년 흉년에 천석을 희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맏아들 전덕례도 아버지를 이어받아 1814년 흉년에 이백석을 희사했으며, 이 두 부자를 기리는 공덕비는 1817년 문경읍 마원리 새재들 복판에 세웠다. 지금은 마성면 모곡리 시조묘 부근으로 옮겼다.
김희순(金羲淳)과 김수근(金洙根)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김수근의 아들이며 후일 국권을 흔들었던 김병학(金炳學), 김병국(金炳國)과 교유하였다. 19세기의 세도정치에서 백성과 나라에 이익이 되는 학문을 해야 한다는 경세학을 주장하였다. 경세학을 실현하기 위하여 권력의 핵심에 있는 김병학, 병국 형제에게 건의하였다. 1860년 사헌부감찰과 장악원주부를 거쳐, 1862년 다스리기 어렵다는 연풍현감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 『뇌서집』이 있고, 문경현에서 동비를 세워 덕을 기렸다.
김성규(金星圭. 1863~1936)의 본관은 안동, 자는 보형(寶衡), 호는 처음에는 운빈(雲賓)이었으나, 어머니 순흥안씨(1835~1888)가 죽은 후 묘 아래에 초심정을 짓고부터 초정거사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연풍현감 김병욱이며 할아버지는 김석근, 증조는 김계순이다. 산소는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임치진(臨淄鎭) 고성내 반룡산 자좌이다.
1894년 고창현감, 1897년 장성군수, 1899년 전라남도 양무감리, 1903년 무안향감리, 충청도순찰사, 1904년 강원도순찰사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초정집(1937)>, 산술촬요(1882), 창녕조씨파보(1914), 무안교지(1931)가 있다.
김우진(金祐鎭.1897~1926)의 자는 원강(元剛), 호는 초거(草耟)이다. 아버지는 김성규와 순천박씨이다. 안동김씨 삼당공파이다. 증조는 김석근이다. 김우진의 선조는 원래 경상도 문경에 세거했으나 증조부 석근 때부터 전라도 무안군 해제면에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고조 김계순의 <당옹집>, 증조 김석근의 <파지와집>, 조부 김병욱의 <뢰서집>, 아버지 김성규의 <초정집>을 4대가 문집을 낸 명문가집이다.
아버지 김성규는 목포의 재력가로 북교동 성당은 성취원(成趣園)이란 저택의 터를 기증한 것이다. 김우진은 구마모토농업학교를 졸업, 와세다대학 예과를 거쳐 1924년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처음에는 시인을 지망하여 시 40여 편을 남겼다. 그 뒤 연극에 관심을 갖고 희곡을 쓰기 시작, 《정오》, 《이영녀(李永女, 1925)》, 《두더지 시인의 환멸(1925)》, 《난파(1926)》, 《산돼지(1926)》등 5편을 창작하였다. 29살의 젊은 나이에 ‘사의찬미’로 유명한 한국최초의 여성 성악가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한 비운의 천재극작가이다.
19세에 전라남도 곡성군 포평리의 하동정씨 정봉현(鄭鳳鉉)의 삼녀 점효(點孝)와 결혼하여 유족으로 1녀 진호(辰浩, 1919~?. 8살)와 1남 방한(芳漢, 1925~2002. 2살)이 있다. 부인 점효는 ‘증점의 효성’이란 뜻으로 공자의 제자 중 효도로는 최고인 증점같이 효성 깊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이름이다. 김우진과 하동정씨 정점효가 결혼할 때 정점효의 아버지가 김우진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가 『운람집』에 남아있다.
김방한은 서울대학교 교수로 비교언어학의 권위자이며, 저서로 <몽골어 연구>, <언어학의 이해> 등 다수가 있다. 장인 경학원 강사 정봉현의 아내는 안동김씨이며 김우진의 조부 문집 『뇌서집』 서문을 썼으며, 『운람집』을 남겼다. 서문은 좌의정 김병학의 양아들 규장각제학 김승규(金昇圭, 1861~?)가 하였다. 김우진의 초혼묘(招魂墓)는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 몰뫼산에 있으며 묘전비에는 <문학사 김우진지묘>라 하였다.
외아들 김방한(1925~2001)은 서울대학교 교수였으며 알타이학회의 초석을 놓았으며 역사비교언어학의 선구자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사랑과 기대를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무안 임치진 고성에 영면하였다. 삼촌 김익진의 영향으로 아우구스티노로 천주교 세례명을 받았다.
김철진(金哲鎭. 1900~1971)은 우진의 동생으로 자는 중명(仲明), 호는 초서(草棲)이다. 목포신간회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34년 문예지 <호남평론>을 발간하였다.
김익진(金益鎭. 1906~1970)은 우진의 동생으로 자는 원신(元信). 호는 야청당(也靑堂)이다. 세례명 프란체스코. 서울 중앙고보, 일본 와세다중학을 거쳐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였다. 천주교에 귀의하여 종교인으로서 사회봉사활동하며 교육자로 살았다. 1948년 대구로 이주하여 교육자로써 왜관 순심중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야인필경>, <야인가학>, <야인정신향>, <민속과서학>,과 번역서로 <동서의 피안> 등이 있다. 묘소는 대구 범물동 가톨릭 범물공원묘원에 묘지번호 3-516호 이다. 부인은 여강이씨 신영(信榮)과 쌍분이다.
당옹 김계순과 파지와 김석근의 <안동김씨이세일고>와 김병욱의 <뇌서집>. 1923년. 둔굴재 소장.
<안동김씨이세일고>와 <뇌서집>에 김우진의 제첨. 목포 성취원에서.
<안동김씨이세일고> 김우진, 철진의 발문.
김성규의 저택 이름 <성취원도서실인>의 <신자전> 1924년. 장서인 크기: 7*4cm
성취원(成趣園)은 목포 유달산 아래 효자 초정거사 김성규가 세상을 피해 살던 저택이다. 평소 자연을 벗하며 사는 것을 사모하여 도연명의 <귀거래사> “날마다 정원을 거닐면 즐거운 정취가 일어난다(園日涉以成趣)”에서 취하였다. 초정은 도연명과 같이 전원을 동경하면서 아래와 같이 성취원을 노래하였다.
昔非隱逸士 지난날은 은일의 선비 아니지만
今作漁樵群 지금은 어부와 나뭇꾼이 되었네.
樹密門常靜 빽빽한 나무에 문은 항상 고요하고
草深路不分 풀이 무성하여 길이 보이지 않네.
課書稚女樂 손녀는 글 읽는 일과를 즐거워하고
澆菜老妻勤 늙은 아내는 채소밭에 물댄다네.
自謂成眞趣 스스로 참된 취미 이룬다고 말하면서
吾園我獨欣 성취원에서 나 홀로 즐거워하네.
2015년 6월의 덕통리 모습
1930년대의 상주 함창읍 덕통리의 모습
상주의 척호재와 장성의 척기재
상주 함창읍 덕통리에 있는 연풍현감 김병욱의 산소는 옥황상제가 수레를 타고 내려오는 옥여봉(玉輿峰)이고 정상은 천황대(天皇臺) 형국으로 마을 노인들은 ‘천제가 옥새를 전하는 형국(皇投璽形)’이라 한다. 산소 뒤에 옥여봉천황대지위 상석이 놓여있다. 산소의 좌측에는 선조의 13남 인흥군 영(瑛)의 태(胎)를 묻고 태실을 조성한 태봉이 있다. 명당 중의 명당이다.
아버지의 제사 및 산소관리를 위하여 재실을 건축하여 척호재(陟岵齋)란 재실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져서 흔적만 남아 있다.
척호재는 『시경』 척호편에 “저 산에 올라 아버지를 바라보노라[陟彼岵兮 瞻望父兮]”에서 온 것이다. 위(魏)나라의 효자가 부역을 가서 고향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읊은 시이다.
덕통리는 조선시대 문경상주로 연결되는 덕통역으로 예천 다인현 수산역에서 유곡역을 향하는 다음 역으로 1899년 역제도가 폐지되면서 초정은 조선의 국유지를 매입하여 척호재를 짓고 아버지의 묘를 지킬 것을 다짐하였다. 국가의 관공서 관아나 역은 모두 명당이다. 역의 뒷산을 매입하여 개인의 산소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척호재는 초가집이 세 동이었으며 동쪽 뜰에는 51척 깊이로 샘을 파고 척호정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권력과 재력이 겸비되어야 한다.
목포에 우거하는 초정은 생전에 세 아들 우진, 철진, 익진을 데리고 부친의 산소를 자주 참배하였다. 무오년(1918) 7월에는 덕통리에 성묘하고 상주 경상도감영의 부속 정자 침천정(枕泉亭)을 북천변으로 옮기고 열리는 연석시회에 참가하여 침천정계 좌목에 이름을 올리고 우진과 함께 침천정 시문에 차운하였다.
초정 김성규 차운시
물 북안 새 정자 천석을 베개 삼고 水北新亭枕石泉
높은 루 아득히 운천에 비치네. 飛甍縹緲暎雲天
맑은 시내 십리에 가을 달 비취고 淸溪十里多秋月
옛 성곽 일천가옥 저녁연기 피어올라 古郭千家接暮煙
이모임 기영회 같아 사람을 대접하고 會似耆英人有待
승지가려 옮긴 듯 가없이 좋구나 移如擇勝地無邊
아들하고 해 마다 롱강로(瀧岡路) 걸으며 携兒每向瀧岡路
지금 같이 등람할 날 몇 년이겠는가 登覽從今又幾年
歲戊午初秋草亭居士 金星圭
김우진 차운시
향을 베지 않고 천석 베고 누웠나니 移香而枕泉
흥망성패 또한 하늘에 달렸구나. 興廢倘由天
술잔 가득 채우는 좋은날 맞아 盛酌逢佳日
나그네 지팡이 짚고 저녁연기 따라왔노라. 旅筇趁暮煙
상산의 청산은 변함없이 푸르고 商山靑不變
낙수는 끝없이 흘러가는구나. 落水去無邊
옷소매 받들고 공경하는 奉袂更加敬
오늘의 놀이 영구히 기억하리다. 玆遊記永年
아버지와 이들의 대화가 시문에 남아 있다. 표현력이 부족한 아버지는 7언으로 하고 표현 잘하는 아들은 5언으로 읊고 있다. 초정의 마지막 귀절은 ‘아들 손잡고 오늘같이 정자에 올라 좋은 경치 구경할 날이 몇 번이겠는가’하고 마감하니, 아들은 ‘(걱정하지 마세요) 도포 입은 아버지 공경히 받들어 이곳의 놀이 오랫동안 기억하겠습니다.’하고 화답하고 있다. 아버지는 앞날을 걱정하고 아들은 희망적이다.
장성 북삼면 용강리(龍岡里) 척기재(陟屺齋)는『시경』척호편에서 위(魏)나라의 효자가 부역을 가서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읊은 시에서 따 온 것이다. 서봉산(瑞鳳山)에 어머니 순흥안씨를 장사지내고 그 묘아래 모정(茅亭)을 짓고 초심정(草心亭)으로 편액하고 스스로 아호로 삼았다. 용강리는 1899년 역제도가 폐지되면서 그 유지를 매입하여 1920년 척기재(陟屺齋)를 짓고 종신토록 어머니 안씨의 묘를 지킬 것을 맹서하였다.
저 산에 올라 陟彼屺兮
어머니를 바라보노라 瞻望母兮
초심정 전경
초심정 편액, 초정 김성규의 글씨이다.
조선 선조(宣祖)의 13남 인흥군(仁興君) 영(瑛)의 태를 1608년 봉안한 태봉
<연풍현감 김병욱의 묘비> 김성규 지, 김철진 서. 1932년.
<초정집> 김성규. 1937년. 목포 성취원.
<김용한의 일반> 김성규. 1931년. 목포 성취원. 김용한(1878~1944) 자 亮叔, 호 晴軒. 본과 안동. 父 灝鎭, 祖 豊均. 통신원주사.
김익진의 <민속과 서학>, 오경웅(吳經熊) 저술 김익진 번역 <동서의 피안>1984년 11판, <동서의 피안> 경향신문사, 1961
<가톨릭청년> 1959년 1월~11월. 김익진 <황사영백서> 번역.
김익진이 <가톨릭 청년> 1958년 5, 6, 7, 8월호에 <재상에게 올리는 글(上宰相書)>을 4회에 걸쳐 번역하여 소개하였는데, <민속과 서학>에 합해서 발표하였다. <상재상서>는 기해박해 (1839)때 정하상(丁夏祥, 1795~1839, 세례명 바오로(保綠))이 재상 이지연에게 올리는 글이다. 정하상은 정약종(丁若鍾)의 차남이며 정다산(丁茶山)의 조카이다.
<상재상서>는 1887년 홍콩교구 나자렛 수도원 고약망(高若望, 요한) 주교가 정하상의 약전을 첨가하여 처음 출판하였다. 1944년 일본어 번역문은 우라가와 와사부로(沛川和三郞)의 저서 <조선순교사>에 수록되어 소개되었다. 한국에서는 1971년 김익진의 <민속과 서학>성바오로출판사 수록하였다.
가톨릭(Cotholicd)은 보편적이란 뜻으로 <중용> 의 과유불급(過猶不及)과 맥을 같이한다. <상재상서>에 "천주교로 유교를 보충하고 유교로 천주교를 보호한다(以天補儒 以儒護天)"는 내용이 있다.
<동서의 피안>은 중국 오경웅(吳經熊)의 저서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유를 불교, 유교, 도교의 진리를 통하여 해명하고 있다. 이것도 김익진이 번역하여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하여 현재 5판까지 재판으로 출판된 기독교인의 필독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