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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집』수집과 보수(補修)

둔굴재 2014. 10. 5. 10:31

 

점필재집』수집과 보수(補修)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초나라 회왕, 즉 의제의 죽음을 조문하기 위해서인데, 숙부인 서초패왕 항우에게 희생당한 어린 조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다. 표면적으로는 의제를 조문하는 내용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한 내용이다. 제자 김일손(金馹孫)은 스승의 이 글이 사림파의 의식을 가장 잘 반영했다고 판단하여 사초에 실었다. 이 사초 문제는 1498년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었고,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되는 화를 당하였다.

 

 점필(佔畢)이란 말은 ‘책을 엿본다’는 뜻으로, 책의 글자만 읽을 뿐 그 깊은 뜻은 알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다. 스스로 겸손하는 말이다.『점필재집』을 만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필요없다고 관심 밖으로 밀려 난 것을 양도받았다.『점필재집』은 7책, 9책의 완질이 있지만 이 책은 점필재집 권지 10~14로 낙질 1책이다. 처음 이 책을 만났을 때는 알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있었다. 하단 여백은 쥐가 갉아먹었고, 뒤쪽 상단 몇 장은 구멍이 나서 애석하게도 몇 글자가 달아났다. 책의 표지는 아래위가 떨어져 나갔고 많이 구겨져 있었다. 순전히 걸레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다행이 책을 묶는 겉 책 끈은 거의 끊어졌지만 종이 못(紙針)은 단단히 박혀있어 낱장으로 분리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세월을 견디어 온 것이 대단하다. 사람의 한평생에도 상처투성이인데 적어도 350년 세월에 상처없는 영광이 어디 있으랴!

 얼마동안 책상위에 올려놓고 점필재선생을 생각하며 수리의 방법과 방향을 생각하여 보았다. 상처가 심하다고 하여 바로 종이와 풀로 수리를 하면 안 된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안정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먼저 도구를 찾아놓는다. 종이, 칼, 가위, 풀, 송곳, 분무기, 명주실, 바늘, 나무망치, 대나무 칼 등이다. 먼저 책의 끊어진 끈을 풀어내어 표지를 해체한다. 해체되었다고 하여 바로 가위나 칼을 대지는 않는다. 요모조모로 생각하고 훼손되어 온 세월만큼은 아니더라도 하루 이틀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

딱딱한 책의 표지에 묻은 먼지와 그을음을 걸레로 닦아주고 분무기로 물을 뿌려 부드러워 지면 대나무 칼로 조심스럽게 일으켜 펴 준다. 빨리하려하면 안 된다. 빨리하면 종이가 처질수도 있다. 표지는 여러 겹의 한지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사이에 다른 종이를 넣고 풀칠한다. 이 때 세월이 같은 종이를 골라 칼이나 가위가 아닌 손으로 한지 발의 결 따라 잘라서 결 따라 붙여야 한다. 천천히 건조하여 재단한 후 다림질한다. 그러면 빳빳해지면서 쫙 펴진다.

 속 책장은 배접하는 것이 좋기는 한데 책이 두꺼워질 염려가 있다. 완전히 훼손 된 것은 어쩔 수 없이 배접을 해야겠지만 가능하면 덜 건드리는 것이 좋다. 긴 세월에 상처 없이 깨끗한 것도 보기 좋은 것은 아니다. 하단 모서리에 쥐가 갉아먹은 부분은 배접하면 책이 많이 두꺼워지니 상처로 두기로 하였다. 뒤쪽 상단도 배접하고 싶었지만 구멍 난 채로 두고 보기로 하였다. 두고 보다보면 도저히 보기 싫어 안 되겠으면 그 때 하면 된다.

 책장 한장한장을 물 뿌리고 다림질하여 펴 준다. 서서히 책이 살아난다. 사람의 손 떼가 묻은 만큼 광택이 나면서 살아난다. 만지면 만진 만큼 살아난다. 한지의 매력이다. 잘 건조하여 안정시킨 후 책끈으로 책을 맨다. 책끈도 책의 부피와 책표지 색을 맞추어 고려하여야 한다. 너무 팽팽하게 당기지도 말고 느슨하게 하여도 안 된다. 그리고 책 테두리로 수리하면서 발생 된 한지의 보푸라기를 불로 그을려주어 주위를 깨끗하게 한다.

이것으로 물리적인 보수는 다 된 것이지만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한 장씩 책장을 넘기며 내용을 음미하며 손 떼를 묻혀야 한다. 한지가 다시 힘을 얻는다. 오래된 고서를 자세하게 읽어보니, 다인(多仁)에서 하룻밤 자는데 비가 와서 잠을 자지 못하고 시를 짓는다는 <숙다인현유우(宿多仁縣有雨)>와 "의성 판항리(板項里)의 백성들은 구름 속에 초가집을 짓고 사는데 망아지, 송아지, 닭, 돼지가 돌밭에 뒹굴고 요(堯) 임금 백성이 홍수를 피해 왔기에 자손들이 서로 산꼭대기에 살자고 경계한다"는 시문이 있고, <차정비안중건운(次鄭比安仲虔韻)>에는 "분분한 세상의 길은 부질없이 갈래만 많아서 복잡하게 한다. 뱁새 둥우리는 가지 하나면 만족하는데... " 시문을 읽으며 조심스럽게 다시 풀칠한다.

 550년 전 점필재 선생이 다인에서 하룻밤 보낸 인연이 다인에서 태어난 오늘의 부일(富鎰)에게 닿았다. 세월을 참고 견디어 세상에 전래되어 온 책을 먼지를 털어내고 사람의 손길이 닿으니 살아난다. 명품은 미완성에서 완성품으로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과정이 필요하다.

 완질도 아니고 낙질 한권을 가지고 애지중지하는 마음은 무슨 뜻일까? 이 봄날에 책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시인은 꽃잎 하나 날리면 봄이 줄어든다고 했는데 수많은 꽃잎 날리며 봄날은 간다. 봄은 봄의 할 일을 하고 간다. 책 한권 만나고 나니 봄이 다 갔네.

봄날의 여인들은 머플러와 가방으로 신사는 모자와 넥타이로 멋을 내는데, 선비는 세상 사람들 눈길도 주지 않는『점필재집』책 한 권 들고 마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온다. 사람이나 물건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난 과거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현재를 사랑하지만 과거의 바탕 위에 미래의 이별까지를 사랑하여야 한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 이별은 제외하고 생각한다.

                                                                                                     둔굴재에서 봄날을 보내며

 

                               <점필재집>    -  다인현에서 자는데 비가 오다(宿多仁縣有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