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부정 회당 최응담(訓鍊副正晦堂崔應淡)
최응담(崔應淡. 1564~1593)의 초명은 대기(大期)이며, 자는 군응(君應) 호는 회당(晦堂)으로 곡강인(흥해)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의병장이 되어 성현 연화봉 아래에서 왜적을 맞아 싸우고, 충의공 권응수(權應銖)의 휘하에 들어가 영천전투에서 흔히 생각할 수 없는 기묘한 꾀로 왜적을 무찔렀다. 그 전공으로 훈련부정(訓鍊副正)에 제수되었다.
적의 화살에 부상을 입고 전장에서 죽어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집으로 돌아오는 과시마혁(裹屍馬革)이 평생의 소원으로 여기고 전쟁에 더 이상 따르지 못함을 한으로 여겼다. 난리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죽음의 그림자가 먼저오니 이룬 공도 없이 나라의 벼슬을 받는 것이 불가하다하면서 <창의일기>와 격문을 불태우고 처음 이름 대기(大期)를 응담(應淡)으로 고치고 그의 큰 공로를 감추었다.
곡강최씨는 시조 최호(崔湖)는 고려 의종, 명종조에 삼중대광 문하시중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 등을 역임하였으며, 삼한벽상공신에 책훈되고 곡강부원군(곡강은 흥해의 다른이름)에 봉해졌다.
최응담의 고조부 최건동(崔健潼)은 현신교위(顯信校尉) 부사직(副司直)으로 전라감사였다. 밀양에 살았으나 경산 반계리((율하동)로 옮겨 살았다. 율하동은 임진왜란 당시에는 곡강최씨의 집성마을이었으며 반계리(磻溪里)로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산군 안심면 율하리와 신기리로 불려져서 지금까지 그렇게 불려지고 있다. 다만 <회당곡강최공유허비>의 최응담의 출생지와 율하동 율하휴먼시아 11단지와 9단지 사이 녹지공간을 ‘반계공원’이라 부르는 것이 옛날을 증명하고 있다.
‘반계’는 중국 절강성에 있는 하천 이름으로 주나라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 낚시하던 곳으로 서백창(西伯昌) 주문왕(周文王)을 만난 곳이다. 경산의 반계리에도 주문왕같이 노인을 잘 봉양하고 겸허하다는 명성이 있는 성인 만나기를 낚시하면서 기다렸다. 혹 세월이 오래고 자료가 부족하여 고증할 수는 없지만, 최응담이 그런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금호강변의 신기(新基)란 곳은 곡강최씨들이 번성하여 새로운 터전을 찾아 옮겨 살았던 곳일 수도 있다.
오늘날의 율하동, 반계리, 대암리는 일제강점기에는 경산현 내북면 지역으로 행주은씨도 세거했다. 가경 9(1804)년 성책 호구단자에 보면 내북면 반계리 유학 은우상(殷遇祥)의 아버지는 사보(思輔), 조부 명옥(命沃), 증조 몽필(夢弼), 여자노비 복남(卜男)이 있고, 가경 15(1810)년 성책 유학 은우상(殷遇祥) 호구단자는 가조사항 동일하고, 대암리(臺巖里) 은종호(殷宗毫)의 아버지는 우상(遇祥), 조부 사보(思輔), 증조 명옥(命沃)이고, 여자노비 월매(月每), 갑매(甲每), 손심(孫心)이 있었다.
대구시 동구 율하동 15(반야월로 97-1)에는 흥해최씨회당공파 종회소 삼사당(三斯堂)과 회당유허비각이 있다. 삼사당의 ‘삼사(三斯)’는 논어 태백에서 증자는 말하였다. “군자가 도(道)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몸을 움직일 때는 조급함과 게으름을 멀리하고, 표정을 바로잡을 때는 믿음에 가깝게 하고, 말을 내뱉을 때는 비속하거나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을 멀리한다.(君子所貴乎道者三, 動容貌, 斯遠暴慢矣. 正顔色, 斯近信矣. 出辭氣, 斯遠鄙培矣)”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대구시 동구 부동(釜洞) 산 22에는 회당공 묘소 아래에 흥해최씨 재실 귀후재(歸厚齋)가 있다. ‘귀후’란 ‘후덕한 곳으로 돌아가다’는 뜻으로『논어』학이편에서 증자가 말하였다. “죽은 자를 신중하게 모시고 먼 조상까지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두터워질 것이다.(愼終追遠 民德歸厚)”에서 온 것이다. 귀후재 좌측은 사사실(斯斯室)이고 우측은 불망헌(不忘軒)으로 편액은 극암 이기윤 의 필적이다. <귀후재기>는 풍산 김태섭(金台燮)이 계묘년(癸卯年, 1903)에 기록하였고, <귀후재상량문>은 하산 성순영(成純永)이 짓고 영천 이인수(李仁洙)가 계묘년에 썼다.
<훈련부정회당최공묘갈명>은 1844년 경산현령 이휘재가 지었다. <유명조선국의병장행훈련부정회당흥해최공응담유허비명(訓鍊副正晦堂曲江崔公遺墟碑銘)>도 경산현령 이휘재가 짓고, 비석은 8세손 영(泳)과 유사 속(涑)이 숭정기원후 사병오(四丙午, 1846)에 세웠다. 이 내용은『운산문집』에 실려 있다.
이중철의『효암집』에도 훈련부정회당최공묘지명(訓鍊副正晦堂曲江崔公墓誌銘)이 있는데 세우기는 이휘재의 것을 사용한 듯하다. 또, 고산서원 <임란의병 충의추모비>에는 최응담의 의병활동기가 소상히 기록되어있으며,『회당실기』가 전한다.
訓鍊副正晦堂曲江崔公遺墟碑銘 幷序
嗚呼慶山縣北有磻溪村壬辰義兵將訓鍊副正晦堂崔公之遺墟也公諱應淡字君應初諱大期曲江人始祖諱瑚高麗檢校大將軍七世祖諱滋 國初以掌令徵不起曾祖諱健潼監司祖諱祥參奉考諱海典籍 嘉靖甲子公生于磻溪里第及長倜儻有奇氣好讀書兼通武藝乙酉丁內外艱哀毁踰禮喪除廢廢擧業築山廬號曰晦堂壬辰四月賊陷東萊直搗京城 大駕西巡公慷慨曰 國危如此寧可竄身求活乎募鄕兵數百進至省峴設伏邀賊大破之又還與賊遻蓮花峰下斬獲甚衆時左兵使朴晉擁兵不肯戰頗沮抑義兵永川人鄭世雅郭懷□上書于招諭使鶴峰金文忠公具陳朴晉意忌不可將之狀文忠公以新寧義兵將權公應銖有智略令列邑義兵皆受其節制軍聲稍振公率衆往從之賊數萬屯據永川權公得公甚喜曰永川爲賊巢窟可先急擊拔之公與諸義將收兵得三千餘人進至楸坪定火攻之策令士卒取枯柴積城外騎士數百日馳馬叫呼賊出兵逆戰公直前衡其中堅賊走入城諸軍乘勝因攻破城門與賊搏戰公面中三矢而氣益勵會東南風急我軍因風放火賊衆悉燒死事 聞大將以下各以功次授賞公爲訓鍊副正八月引兵至三閭賊大喊猝至公射殪其將平義訓權公應銖與左兵使朴晉會軍鷄淵因進薄城下公爲後督賊登高放丸公大呼曰復永川將軍在此賊驚懼乘夜遁去冬公疾甚還舊居權公遺書强起之公見書泣曰今病已矣無以自力謂家人曰始吾起兵欲爲國討賊本不希功賞因燒倡義日記癸巳二月初三日卒于家年三十於乎公眞義勇也以妙年從戎奮志殲賊而永陽之戰僅得一捷輿疾歸家飮恨長逝何其事之悲也余守玆縣公之七世孫泳欲立石以表遺墟採摭權忠毅公亂中日記屬余一言余爲縣中古事不宜終泯滅乃已北望江上重發懷古之悲遂爲之銘曰
勇赴國亂少年名將忠毅幕下功莫與竝永陽鷄淵身先被創軍行露宿霧毒交加病不堪戰乃隕于家旣闕 恩贈亦燒義錄有水鳴鳴有山嶪嶪一片遺墟千秋徽蹟
通訓大夫行慶山縣令眞城李彙載撰
<흥해배씨 회당공파 종회소>, <삼사당(三斯堂)>
회당유허각
회당유허각 현판
훈련부정 회당 최공 유허비
<회당유허각>과 <흥해배씨종회소>, <삼사당> 전경.
<회당유사> 필사본.
이하의 사진은 2019년 4월 20일(일) 직접 답사한후 찍은 것이며, 문장을 일부 수정하였다. 복현동에 산다는 후손 내외분이 귀후재 마당에서 쑥을 뜯고 있었다. 율하동에 있던 유허비는 귀후재 마당에 옮겨져 있었다. 도시의 팽창으로 문화재가 옮겨져야 하는 일이 생겼다. 특히 이런 비석류는 제자리에 있는 것이 중요하므로 조금만 자리를 만들어 주면 좋겠다. 옛날에는 산사람이 죽은 사람을 두려워하였는데, 이젠 죽은 사람이 산사람을 두려워한다. 산소나 사당이 있으면 비켜서 개발하였지만, 이젠 산소나 사당을 사람사는 곳에서 멀리로 쫓아버린다. 발전이란 명분으로 먼 조상을 추모하지 않으면 백성의 덕은 후덕해 지지 않는다. 죽은 사람을 산 사람같이 하여도 안 되지만 죽은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여도 안 된다.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귀후재
<귀후재> 편액. 극암 이기윤 서.
사사당(斯斯堂)
불망헌(不忘軒)
<귀후재기> 풍산 김태섭(金台燮)
<귀후재상량문> 하산 성순영(成純永)
<유명조선국의병장행훈련부정회당흥해최공응담유허비명(訓鍊副正晦堂曲江崔公遺墟碑銘)> 경산현령 이휘재(李彙載) . 1846년.
훈련부정 회당 최응담 분묘.
훈련부정 회당 최응담 분묘의 문관석.
훈련부정 회당 최응담 분묘의 문관석.
<훈련부정회당최공묘갈명> 경산현령 이휘재 찬. 184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