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산지(丹山池)
대구에 살면서 학창시절부터 불로고분군과 단산지에서 소요유하던 곳을 성장하여서 다시 찾아왔다. 그 때도 혼자였고 지금도 혼자서 산과 물을 보며 걷는다.『주역』에서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종종 한사람을 덜어내지만 한사람이 길을 가면 도와주는 벗이 있다(易曰 三人行則損一人 一人行則得其友)하였다. 세 사람이면 많아서 생각이 흩어지고 한사람이면 적어서 대화가 없음을 말한 것인가? 그러나 산과 물을 벗삼아 걸어간다.
단산(丹山) 아래에 봉무동(鳳舞洞)이 있고 불로동(不老洞)이 있다. 봉황이 깃들이는 단산이 있고, 봉황이 춤추는 마을이 봉무동이고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태평성대한 세상을 살고 있어 늙지 않으니 불로동이다. 해안면에는 불로, 구성, 단산, 봉무, 노은 등 봉황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 많다. 구성(九成)은 “『서경』의 소소구성 봉황래의(簫韶九成 鳳凰來儀)”에서 온 말로써 “순임금의 음악 소(韶)를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이 날아와서 예의를 갖추었다”는 뜻이다. 봉황은 태평성대한 시절에만 날아온다. <경북궁타령>에 “단산본황(丹山鳳凰)이 죽실(竹實)을 물고 벽오동을 넘나든다”고 하였다.
‘단산’은 팔공산의 별칭이다. 팔공산은 오동나무에 봉황이 앉는다고 동수산(桐藪山)이라고 불려지기도 하였으며, 동화사 창건설화에도 봉황과 관련이 있어 봉황이 모여들라고 대웅전 문루가 봉서루(鳳棲樓)이다. 태평 성대한 세상에서 늙지 아니하니 혼탁한 세상을 피하여 달성십현의 송담 채응린과 괴헌 곽재겸 등의 선비들이 터가 아름다운 미대동과 봉무동, 불로동에 살았다. 봉무동은 강동, 독암, 단산, 위남이라는 네 개의 자연부락이 모인 마을이다.
일제강점기의 해안면에는 봉무동의 단산지, 부동의 부지, 부동의 갈석지, 부동의 호지, 방촌동의 어리지, 검사동의 나리지, 입석동의 적지지, 불로동의 대명지, 지저동의 원당지, 평리동의 신덕지와 낙민지가 있었으며, 단산지는 수심이 8자이며, 유지면적은 1정보 4.2묘이며 몽리면적은 15정보이다.
단산지는 1933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는 무단정치 대신 문치를 내세우며 농촌진흥운동의 일환으로 대구의 대표적 유람지인 수성못과 함께 만들어졌다. 입구 못뚝에는 단산지를 축조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해안수리조합기념비’가 있다.
지금 사람들은 망가져 있는 비석에 그렇게 관심두지 않는 것 같다. 왜 망가져 있는지 의문을 갖지도 않는다. 아주 보기 싫으면 완전히 없애버리면 될 것인데 그러지도 않고 무관심하게 역사는 돌아간다. 석질이 괜찮은 오석으로 크기는 52*140*25cm의 큰 비석이다. 보기 싫을 정도로 비석과 비문이 크게 훼손되어 있다. 현재의 단산지가 축조되기 전에 못 안에는 단산동(丹山洞)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 단산지를 축조하면서 단산지 안의 마을을 현재 단산지의 왼쪽 언덕으로 이주시켰다. 못 안에 있던 단산동은 성주배씨의 집성촌으로 현재 단산지의 왼쪽 언덕 위와 근처로 이주하였다.
넓은 농토에 비해 작은 저수지가 있던 것을 크게 축조했다는 내용이 비문속의 문장에서 어설프게 해독할 수 있었다. 단산지의 축조는 마을 이주시키고, 동화천의 물을 2개의 터널을 뚫어 단산지로 유입 하는 큰 공사였다.
단산지의 수원은 공산동 보성아파트 앞 동화천의 물을 끌어오는 큰 역사였다. 첫 번째 도수로터널, 제일수도(第一隧道)는 공산동주민센타에서 시작하여 파군재 고개 밑에 까지다. 유입부 터널 입구 위에는 ‘제일수도 군수 신현구서(第一隧道 郡守 申鉉求書)’의 화강석 명문이 각석되어 있다. 제1수로 유입부의 크기는 2.5*2.5cm 정도로 보여진다. 유출부는 현재 건물이 지어지면서 맨홀이 만들어지고 복개되어 있다.
두 번째 도수로터널, 제이수도(第二隧道)는 강동마을 동쪽에 있으며 수리시설물로 수문유입부에 스핀들 2문과 제어장치 1문이 설치되어 있다. 유입부 수문의 크기는 내경 150*150cm, 외경 360*350cm 정도이다. 유입부 유출부 터널 입구 위에는 ‘제이수도 조합장 서병주서(第二隧道 組合長 徐炳柱書)’의 화강석 명문이 각석되어 있다. 대구시 안내에는 길이가 150m로 되어 있으나 실제는 더 길어보였으며, 폭은 182m, 높이 168cm로 성인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단산지의 저수를 배출시키는 수로에는 ‘단산지 지사 김서규(丹山池知事金瑞圭)’의 화강석 명문이 각석되어 있다.
단산지를 축조하는 일은 국가적 중요한 사업이었으므로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경상북도지사 김서규(金瑞圭), 달성군수 신현구(申鉉求), 달성군수 박제륜(朴濟輪), 조합장 서병주(徐炳柱) 등의 관리들이 직접 참여하였으며 준공 후에는 화강석에 이름을 각석하였다. 비문은 해안수리조합장 서병주가 짓고 썼다.
<해안수리조합기념비>는 훼손되어 해독할 수가 없어 처음 일부와 마지막 인명부분만 옮겨 적어 본다.
[비문]
解顔水利組合紀念碑
達成之東十里許解顔面野大池小歲多被界面有 ... .
소화 팔년 오월 십팔일 달성 徐炳柱 撰拜書.
조선총독 宇垣一成, 경상북도지사 金瑞圭, 달성군수 朴濟輪, 조선총독부기사 □本□□, 조합장 徐炳柱, 經事 □□□□□, 경상북도산업기수 □本□□, 서기겸출납역 李相豪, 서기 李癸得
창립위원장 徐炳柱, 위원 金在煥, □□□□□, 尹亨普, 李英勉, 위원 崔壕, 南相鎭, 梁主植, □□□□, 崔鍾鼎, 裵孝原, 李相台, 李敬魯, 李敬熙, □□□□, 柳根甫, 崔鍾建.
위 비문에서 중요인물의 행적을 단산지및 대구지역과 관련하여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868~1956)는 일본의 군인이며 정치인이다. 오카야마현(岡山縣)출신.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후 독일대사관 무관으로 출발하여 1924년~1931년 유군대신을 지낸후, 1931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 총독을 역임하고 1938년 외무대신과 척무대신을 거쳐 1953년 참의원이 되었다.
조선 총독 재직 당시에는 무단 통치 대신 문치를 내세워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 농촌진흥운동을 추진했습니다.
경상북도지사 김서규(金瑞圭, 1875~1935) 본관은 안동. 1931~1935년 경상북도지사 역임하였으며, 대구시 교동에 유지되어 오던 대구향교를 1932년 달성군수 박제륜과 현재의 남산동으로 옮겼다. 1931년『달성군지』서문 쓰다.
달성군수 신현구(申鉉求, 1886 ~ ?)는 일제 강점기의 달성군수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1931년『달성군지』서문 쓰다.
경북도지사 김서규의 간찰. 4 5*25cm
달성군수 박제륜(朴濟輪, 일본식 이름 中原正道, 1886~?)은 1931. 12. 28일 부임하여 1933. 7. 27일까지 달성군수로 재임하였다.
조합장 서병주(徐炳柱)의 본관은 달성. 호는 태당(兌堂).
일제강점기 대구지역 대지주로 1927년 대구부학교조합 평의원과 1929년 경산군 고산면의 호련제(湖蓮堤)수리조합장, 1931년 달성군 해안면에 해안수리조합장, 관선 경상북도 도의원 등을 지냈고, 기업을 세워 경영하기도하였다.
서병주는 석재 서병오의 제자로 알려져 있으며, 글씨와 서화에 소질이 있어 동화천 물이 단산지로 유입되는 터널수문에 ‘제이수도 조합장 서병주서(第二隧道 組合長 徐炳柱書)’란 친필 명문이 각석되어 있다. 2017년 2월 대구미술관에 <대구미술을 열다. 석재 서병오>전시회에서 묵매 한 점과 2017년 12월 대구문화예술회관에 <석재 추사와 석파를 넘다. 석재 서병오>전시회에서 병풍 10폭이 소개되었다. ‘서병주(徐炳柱)’란 이름은 통도사 이름바위에도 보인다. 동일인으로 추측해 본다.
당시 달성서씨 집안에는 석재 서병오와 여농 서병규, 서병주가 3명의 문화계 인사였으며 달성의 재력가였다.
단산지의 해안수리조합기념비
제2 유출 도수로. <제2수도 조합장 서병주 서>
제2수도 유출 도수로
단산지 제2수도 유출 도수로 원경
제2수도 유입 도수로 수문
제1 유입 도수로. <제1수도 군수 신현구 서>
제1 도수로 유출부는 대구시 우회도로공사로 복개되어 맨홀로 되어 있다.
제1도수로 유입부
단산지 저수유출부. <단산지 지사 김서규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