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학회보> 제4호 1976년, <민학회보> 제5호 1977년, <민학회보> 제6호 1980년, <민학회보>제7호 1983, <민학회보> 제18호 1988년, <민학회보> 제21호 1989년, <민학회보> 제34호 1997.
민학(民學)이란?
▪「민(民)」이란 한자에서 민학의 개념을 찾다.
‘민(民)’자의 자형은 한쪽 눈을 바늘로 찌른 형상을 본떠, 한쪽 눈이 멀어 진 노예, 또는 피지배인의 뜻에서 백성의 뜻을 나타낸다. 국가의 통치를 받는 사람으로서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뜻한다. ‘민’은 역학에서도 곤(坤), 즉 땅에 해당한다.
춘추시대 관중(管仲, ?~기원전 645)은 “왕 노릇하려는 사람은 백성을 으뜸으로 여겨야 한다(王者以民爲天)”고 하였다. 관중은 왕 노릇하려는 사람은 목동이 양을 돌보듯이 백성을 보살펴야 한다는 목민(牧民)사상을 정립하였다. 공직자를 목민관이라 하는 이유이며 목민관이 마음에 새겨야 하는 책이 다산의『목민심서』이다.
『맹자』의 여민동락(與民同樂)은 더 적극적인 개념으로 한 단계 들어 올린 것이다. 북송의 정치가 범증엄은 <악양루기>에서 “천하의 근심을 앞서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후에 즐긴다.”는 글은 여민동락의 절정이라 하여도 될 것이다. 이는 세상에 대한 사대부의 책임 의식을 잘 드러내는 문장이다.
이런 생각은 조선의 세종 29년(1447)에 간행된『용비어천가』에 “백성은 왕이 으뜸으로 한다.(民者王所天)”이란 말로 연결된다.
민의 민노설(民奴說)의 실마리는 청나라 말 양계초(梁啓超)의『태고급삼대재기(太古及三代載記)』(1922)에 보면 거기 스스로 주석을 단 부분에 “민(民)의 본뜻은 노예이다.(民之本義爲奴虜)”라고 하였다.
민(民)은 십(十)과 목(目)으로 구성된 글자이다. 그렇다면 십목(十目)은 무엇일까?『대학』에 “십목소시(十目所視)”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십(十)은 숫자 10에서 나아가 ‘수많은’을 뜻하니 십목소시(十目所視)는 많은 눈들이 지켜보는 바이다. 따라서 민(民)은 왕과 관리들을 주시하는[目] 다수[十]의 사람들, 곧 백성을 의미한다.
주시하는 자는 백성이자 곧 하늘이다. 이처럼 ‘민(民)’자에는 백성을 하늘로 보고 두려워할 줄 아는 고대 왕들의 동양철학적 인식인 민주주의 사상이 담겨 있다.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준말이니, 현 시국처럼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에서 민천주의(民天主義)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 민학은 어느 학문에 속하는가?
『시경』이 민의(民意)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하여 채시(采詩), 진시(陳詩), 헌시(獻詩) 등의 방법에 의하여 수집되었듯이, 민학은 어느 한 분야의 학문은 아니지만 우리 생활의 어느 곳 하나 바탕이 되지 않는 곳이 없다. 근본의 학문이고 기층문화이다.
민학이란 민간에서 유행되었던 풍속이나 관습, 의례 등을 수집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귀족이나 상류층이 아닌 일반 민중들이 생활하고 사용하던 서민의 학문을 말한다. 혹 ‘민(民)’이라 하여 낮은 학문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이 사람 살아가는 방법은 같고 서로가 주고받는 관계일 뿐이다. 단지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어서 관심에서 멀어져 학문적으로 이론화, 체계화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 민학의 성립
일본의 사상가이자 민예운동의 창시자이며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1913년 동경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유럽유학을 마친 후 1919~1923년까지 동양, 명치, 동지사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동양미술국제연구회 상무이사를 역임하다가 1929~1930년까지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동양미술을 강의하였다.
그러다가 1916년 친구였던 아사카와 노리타가(淺川伯敎, 1884~1964)의 권유로 조선을 방문하게 된 것을 계기로 21차례나 조선을 왕래하면서 조선미술의 특징이 민중임을 알아보고 1924년 서울에 조선민족미술관을 1936년 동경에 일본 민예관을 설립하고 조선도자기 전람회와 조선미술전람회를 열기도 했다.
1926년 규슈지방 서부에 위치하는 오쓰시(大津市)의 상품진열소에서 이 도시에서 이름을 따온 오쓰에 전람회가 열렸다. 오쓰에서 민화한 용어가 나왔다. ‘민화(民畵)’란 정통회화를 모방해서 생활공간의 장식 또는 민속적 관습에 따라 제작된 실용화를 말한다. ‘민화’란 개념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일본의 토속민중회화인 오쓰에에서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는 여행지 거리에서 여행자들에게 그려 팔던 싸구려 그림을 말한다고 한다.
‘민예(民藝)’란 용어는 교토의 아침시장에서 노파들이 파는 아주 흔하고 값싼 물건 ‘게테(下手)’니 ‘게테모노(下手物)’니 하는 속어였다. 따라서 민기(民器)라든가 잡기(雜器) 같은 물건들이 이 말에 해당된다. 이 단어가 사회 전반으로 널리 확산되면서 잘못 사용되거나 어처구니없는 의미로 유용되면서 오해를 받거나 곤욕을 치렀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속어를 쓰지 않도록 그 대체 용어를 만들어 낼 필요성을 느끼고, 마침내 ‘민예’라는 낱말로 정착됐던 것이다.
민학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름없는 작가들이 만든 물건에 흥미를 갖으면서, 민화, 민예에서 미적가치를 찾아내 의미를 부여하고 칭송하는 학문이다. 일본 교또는 민예운동의 발상지이다.
1970년대 산업화가 막 시작 될 무렵, 낡고 오래된 것들이 빠르게 새로운 것들로 대치되어 가는 것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이 무렵 조자룡은 일본 교토의 고려미술관장 정조문(鄭詔文) 등의 일본 민예운동가들을 만나면서 한국의 산업화에서 없어져가는 것들을 수집 연구하면서 한국에도 이런 단체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미쳐서 1971년 처음 민학회가 창립되어 초대회장 통문관사장 이겸노(李謙魯, 1909 ~2006), 에밀레박물관장 조자용(趙子庸, 1926~2000)과 경일건설주식회사 대표이사 이세준(李世俊, 1928~2007), 민속학자 심우성(1934~현재) 국립경주박물관장 강우방(1941~현재)등이 모여서 백성의 문화를 연구하는 모임으로 제도권에서 관심 갖지 않던 것을 답사하여 수집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 계속 수정 보완하는 글입니다. 다른 의견이 있으면 연락해 주시면 보완하겠습니다. 둔굴재 拜.
<회원명부> 대구민학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