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손 보백당 김계행(金係行)
김계행(金係行, 1431~1521)의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 아버지는 비안현감 삼근(三根)이며, 한성판관 계권(係權)의 동생이다. 1447년(세종 29)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과 교유하였다. 49세에 식년 동당시 합격하였으며, 52세 때 고령현감을 역임하였다. 대사간을 역임하였으며 사헌부장령, 승정원동부승지, 승정원도승지, 성균관대사성 등 요직을 두로 섭렵하였다
만년에 송암폭포 위에 만휴정(晩休亭)을 지었다.『보백당선생실기』가 전한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1706년(숙종 32) 지방 유생들이 김계행의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 묵계서원(默溪書院)을 짓고 향사하였다.
아호 보백당(寶白堂)은 ‘우리 집에 보물이란 없으니,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 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에서 취하였으며, 이것의 전고는『대학』과『국어(國語)』초어(楚語)하에 자세하게 나온다. “초나라는 보배로 삼는 것이 없고 오직 선인을 보배로 삼는다.(楚國 無以爲寶 惟善 以爲寶)”하였다. 이는『대학』제37장에도 같은 내용이 있으며, 다음의 일화가 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먼저 초나라의 대부 왕손어(王孫圉)가 진(晉)나라를 방문하였을 때이다. 진나라 정공(定公)이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그때 조간자(趙簡子)가 패옥을 울리면서 예의를 갖추어 인사하며 왕손어에게 물었다. ‘초나라에 백형(白珩)이란 옥이 아직 있습니까? 그것을 보배로 삼은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라고 물었다. 왕손어거 대답했다. “우리 초나라에서는 그것을 보배로 삼은 적이 없습니다. 초나라 보물로는 관역보(觀射父)가 있습니다. 그는 응대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제후들과 교제하면 아무도 우리 군주에게 꼬투리를 잡지 못하게 합니다. 또 조사(左史) 의상(倚相)이 있습니다. 그는 선대의 전적과 제도를 잘 알아서 온갖 일을 잘 처리하고 아침저녁으로 군주에게 역사의 흥망성쇠를 들려주어 선왕들의 업적을 잊지 않게 하며, 또 여러 귀신들을 기쁘게 만들 줄 알고 귀신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 따라서 일을 처리하여 귀신들이 우리 초나라에 원한을 품지 않게 합니다. 또 운몽택(雲夢澤)이라는 늪지가 있어 거기에서는 쇠와 나무들, 전죽(箭竹)이 납니다. 점칠 때 쓰는 거북 등껍질 귀갑(龜甲), 진주, 활 만들 때 쓰는 수각(獸角), 상아(象牙), 짐승가죽, 물소가죽, 깃털, 소털 따위는 군사용으로 쓰이니, 예상 못 한 일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후들을 접대할 때 예물로도 바칠 수 있습니다.”
진나라 조간자와 초나라 왕손어가 보물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진나라 조간자는 초나라에서 생산되는 관복에 달고 다니는 백형이란 옥을 보물로 생각했다. 초나라 왕손어는 초나라는 옥을 보물로 삼은 적은 없고, 단지 보물이라면 응대하는 능력이 뛰어난 곽역보와 선왕의 흥망성쇠를 들려주는 의상이란 신하가 있다. 그리고 운몽택에서 나는 전죽, 귀갑, 수각, 상아 등을 군사용으로 쓰니 예기치 못한 일에 대비한다 하였다.
<보백당선생실기>. 1901.
묵계서원 배향 옥고(玉沽, 1382~1436)의 <응계선생실기>. 1730 <보백당종계변증록> 1958.
<안동김씨보백당종택> 한국국학진흥원. 2017. <보물은 오직 청백 뿐> 한국국학진흥원.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