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사는 비봉산(579.3m) 동쪽 산기슭에 위치하는데, 고려 공민왕 17년 (1368) 왕사인 지공선사와 나옹선사가 창건한 가람으로 처음에는 대국사(大國寺)라 불렸다. 임진. 정유왜란에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군대가 낙동강을 건너기 전에 양민을 학살하고 사찰을 불지르니 전소되어 조선 선조 38년(1605) 원우대사(垣祐大師0가 중창하고 조선 숙종13년(1687) 태전선사(太顚禪師)가 중건하였다. 이때 태전선사가 이 곳 태행봉에 올라 지형을 살펴본 즉 백리나 되는 긴 계곡이 절을 감싸고 돌아가고 있어 대곡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대곡사의 창건연대는 신라말 고려초에 창건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고증으로 대곡사 “탑밭”에서 출토된 금동불상과 다층 청석탑, 그리고 이규보의 17일 대곡사 탐방시를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금동불상은 통일신라전후로 추정되며, 다층청석탑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탑이며, 특히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고려 명종26년(1196) 29세 때에 혼자서 조랑말을 타고 전국을 여행 중 선산 노자석 아래서 뱃놀이하고, 대곡사에 8월 17일 가을바람이 부는 늦은 저녁에 들었다. 19일에는 용궁 용비산 장안사에 들르고, 21일에는 지금의 풍양 하풍진에서 뱃놀이하면서 이곳을 다녀갔다. 이 시 하나로도 172년이 앞 당겨진다.
고려의 명문장가 이규보가 대곡사에 다녀가면서 시한수를 남겨두어 대곡사는 영원히 빛날 수 있었다.
▪ 十七日。入大谷寺。 십칠일에 대곡사에 들어가다
石路高低平不平。 돌길이 높고 낮아 울퉁불퉁한데,
閑騎果下彈鞭行。 한가하게 과하마(果下馬) 타고 채찍질해 간다 .
輕風靜掃烟光去。 가벼운 바람은 조용히 연기 빛을 쓸어가고,
落月時兼曉色明。 지는 달은 새벽빛과 함께 밝구나.
短麓前頭看寺榜。 짧은 기슭 앞머리에서 절 방(榜)을 보고 ,
橫舟側畔問灘名。 비낀 배 곁에서 여울 이름을 묻는다 .
孤村何處吹寒笛。 외로운 마을 어느 곳에서 부는지 쓸쓸한 피리 소리,
抱疾他鄕易惱情。 타향에서 병을 앓으니 쉽게 슬퍼지는구나.
[주]과하마(果下馬) : 키가 작은 조랑말 따위로서 타고서 과실나무 밑으로 지날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었다.
인조원년(1623)에 향적전을 지었고, 인조25년(1647) 적조암을 짓고, 효종4년(1650)에는 범종루를 세웠고, 효종9년(1658)에 명부전을 지었고, 영조19년(1743)에 사순(思順)이 대웅전 삼존불상을 개금하고 영조27년(1751)에 등계벽담(登階碧潭)이 대웅전에 누수 되는 기와를 번와하였으며, 영조41년(1765) 적조암 삼단탱화를 봉안했으며, 헌종13년(1847)에 구포루를 세웠으며, 1950년대에 최영태(崔永台) 스님이 적조암의 극락전과 산신각을 지었다.
대곡사가 한창 번성 할 때에는 암자가 아홉 개나 있어서 있어서 비봉산 전체가 하나의 불국토 였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적조암도 중년에 헐려서 원래 모습을 많이 훼손되었고, 나머지의 암자는 이름마저 기억하는이가 드물어지고 암자 터도 세월 따라 희미해져간다. 문헌을 조사하여 보니 대곡사의 구암자는 구암, 염불암(念佛庵), 회동암, 적멸암(寂滅庵), 원적암(圓寂庵), 보덕암(寶德庵), 양진암(養眞庵), 적조암(寂照庵), 봉서암(鳳捿庵)으로 밝혀졌다.
먼저 구암은 본사에서 서북쪽으로 1500m지점에 구암자가 있었다 한다. 암자 이름이 구암인지 아홉 암자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1000여명의 스님이 기거했다는 전설을 따르면 후자가 확실하다고 하겠으며 구암자가 있는 고을을 불당골이라 한다.
염불암은 본사에서 서남쪽 800m 지점에 있는데 지금은 축대와 빈터가 남아 있다. 회동암은 본사 서남쪽 800m 지점에 있는데 빈터가 남아 있다. 염불암과 회동암은 적조암과 평행선상에 있다.적멸암은 남고(南皐) 박응형(朴應衡, 1605-1658)이 고령 우곡에서 태어나 17세에 외가인 예천 금곡에 살면서 1623년 19세 때 매오(梅塢) 정영후(鄭榮後)의 딸 동래정씨와 혼인하였다. 20세때 정경세의 묵곡제(墨谷第)에 나아가 수학하고‚ 23세때 수암(修巖) 유진(柳袗)에게 수학하였다. 1632년 28세에 수산(守山) 신기에 남고정사(南皐情舍)를 이룩하였다. 고령 우곡 남고정의 모태이다. 다인에 봉악서당도 건립하여 <봉악서당상량문(鳳岳書堂上樑文)>도 지었으며 돌아가시기 일 년 전에 다인을 떠나 이듬해에 도진에서 돌아가셨다.
<남고선생연보>를 살펴보면 “1627년 23세에 적멸암에 올라서 독서를 하였으며, 암자는 비봉산의 상봉에 있으니 바위를 깨어 집을 걸쳐 지었는데 맑고 깨끗하여 좋았다. 그리고 두 달간 머물렀다. 1645년 41세 때 적멸암에 權寬 金慶 金鏞이 함께 머물렀으며, 1648년 적멸암에 머무르며 제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시를 통하여 적멸암의 모습을 상상 할 수있다.
▪ 적멸암에 붙이다 題寂滅庵 巫山一段雲
경치 좋은 곳에 좋은 집을 지으니 地勝開金屋
산이 높으니 신선에 가깝구나. 山高近紫霞
맑은 강은 도도히 흘러가고 淸江滾滾走
긴 모래밭은 십리에 뻗쳐 끝이 없도다. 長沙十里浩無涯
이름 없는 풀은 그윽한 산길에 자라고 小草生幽逕
한가로운 꽃은 나무 그루터기에 떨어지네. 閒花落古査
신선놀음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어버리니 仙遊忘却返塵家
창밖에는 해가 지는구나. 窗外夕陽斜
▪ 암자 스님에게 드리다. 戱贈庵僧
적멸암의 스님은 寂滅庵中子
오랫동안 정성을 들였다. 多年好養情
청산은 모두 자연의 빛이요 靑山皆寡色
유수는 모두 고요히 흐르도다 . 流水總無聲
글씨에는 신바람이 일어나고 筆下神風起
가슴에는 성품이 바다같이 맑도다. 胸中性海淸
이미 법계 이루어 졌음을 알았으니 已知成法界
어느 날 극락세계 밟으려는고. 何日躡瑤城
원적암은 모산(慕山) 권혜(權惠, 1693~1747)가 안동 풍산 원당리(元塘里)에서 출생하였으며, 성년이 되어서는 병곡屛谷 권구權榘(1672~1749)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평생 지명안분知命安分을 지향하며 학문과 실천에 힘써 지역에서는 그를 ‘산림처사山林高士’, ‘성세일민聖世逸民’이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한편으로 남인 당색이 두드러져 ‘오당(吾黨)의 사표(師表)’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1723년에 쓴 그의 시중에 <대곡사로부터 지장전에 머무르다 옮기다. 원적암에 제시하다.(自大谷寺移地藏留題圓寂庵)>로 미루어 이 암자는 이때 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보덕암은 동암(東庵) 홍대구(洪大龜. 1670~1754)는 목재 홍여하(洪汝河. 1621-1678)의 손자로서 덕행이 훌륭하였고 어려서부터 고인의 爲己之學에 潛心하였고‚ 經書를 읽으면 반드시 箚記를 짓고‚ <周易>을 만번이나 읽어 경학에 심오하였다. 평생 저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뜻을 돈독히 하여 經學을 연마하였으며‚ 지금 남아 있는 글들은 단지 하찮은 것이라고 한다. 시 중에서 <비봉산 보덕암에 붙이다 題飛鳳山寶德庵>란 시가 있다.
양진암은 송설헌(松雪軒)정태래(鄭泰來)는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의 현손으로 1761년 18세에 친구 장계언張季彦과 동생이 이슬비 내리는 날씨에 비봉산을 등산하고 <유비봉산기(遊飛鳳山記)>를 남겼는데 등산기에 의하면 본사에서 적조암을 지나 비봉산 정상을 오르면서 처음 만나는 암자이다.
적조암은 1647년에 창건하여, 9암자 중 유일하게 현재 까지 남아 있으며 멀리 조망할 수 있는 구포루(九苞樓)를 갖고 있으며, 누각에서 임산부의 모습과 문필봉, 좌청룡 우백호가 확실하게 갖추어진 비봉산 최고 명당이다.
▪ 題寂照庵壁
朱夏山中避暑遊 한여름 산중에서 노니매
谷風松籟爽如秋 골짜기 솔바람이 가을 같구나.
淹留十日忘塵事 암자에 열흘간 머무니 세상일 잊었고
來往三庵遣客愁 세 암자에 오고가며 나그네 근심 보낸다.
濕露鶉衣治藥圃 이슬에 젖어 깊은 옷은 약포를 다스리고
明經鶖眼坐禪樓 경에 밝은 맑은 눈은 좌선하는 누대에서다.
自憐人世成何業 내 가련함은 세상에서 무슨 업 이루었던고
半白浮生已白頭 반평생 뜬구름 같은 인생은 이미 백발이네.
1647년에 적조암이 창건하였으니, 적조암 창건 직후 제일 이른 시기 박응형의 시이다.
▪ 題寂照庵僧壁 海左 丁範朝(1723~1801)
菴子吾重到
懸知上頂難
雲根攀幾級
僧語動無端
落日松烟淨
半空山雪寒
觀音眉眼熟
不似書中看
▪ 적조암에서 독서하며 寂照庵讀書
如來古國掃苔文 부처의 절집에서는 이끼를 제거하고,
鳥獸相親共一群 날짐승은 서로 지저귀며 모두 한 무리이네.
舊面林間惟見月 예전에 본 숲에는 오직 달만이 보이고,
明朝枕畔只生雲 내일 아침 베개 머리에는 구름만이 일어나겠네.
炊餘煮藥香遲歇 밥 짓고 남은 불로 약 달이니 향 피우기 더디고,
書暇看山事倍勤 책 읽는 겨를에 산을 보니 일은 더 바쁘네.
以外茫茫何世界 이 밖에 넓고 아득한 어느 세계는
紛紛榮辱了無聞 어수선한 영욕은 들은 바 없는 걸로 하리.
적조암은 특히 문필봉을 바라보며 독서하기에 적합하다. 그래서 많은 선비들이 독서를 위하여 이곳을 다녀갔다. 그리고 출세도 하였다. 다인 사호 출생의 선비 낙파(樂波) 김용한(金龍漢. 1826~1891)의 작품이다.
▪ 寂照小話 靜山 金溶夏(1873~1941)
躡屩穿林訪釋家
羊腹不覺驗幾何
傍山冽澗淸生石
繞礎奇花紫奮霞
五月高堂詩髓冷
千年塵榻佛頭斜
故人不到苔痕沒
空對晴峰逸興加
봉서암은 정태래의 <유비봉산기>에 의하면 비봉산의 정상 부근에 있었으며 석초산인(石樵散人) 권노경(權魯慶)의 시에 “누각이 종소리에 떴으니 부처의 자취가 머물고, 암자에 봉자를 썼음은 산 이름을 따른 것이다. (樓泛種聲留佛跡 庵題鳳字托山名)”고 한 암자가 봉서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