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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의 <구고연금(求古硏今)>

둔굴재 2018. 8. 29. 19:50


  김종호(金宗鎬, 1901~1985)의 본관은 의성, 호는 석당(石堂), 소백산인, 소남(小南)이다. 나는 평소 서예작품 감상하기를 좋아하여 일부 명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원래 석당 작품은 두 점을 보관하고 있었다.

 <구고연금(求古硏今)>과 또 다른 작품 <구성구택(龜城舊宅)>을 보관하고 있었다.  2001년 선고의 비문을 석암(石庵) 김영숙(金榮淑)교수에게 부탁한 적이 있다. 김영숙 교수는 영주가 고향이며 석당 김종호를 사사하였으며 선고 비문을 글 짓고 썼으며 서재이름 <둔굴재> 편액도 써 주었다. 이에 석당의 <구성구택(龜城舊宅)>을 감사표시로 드렸다. 구성(龜城)은 영주의 고호로 잘 어울릴 것으로 생각하였다.  교수님의 아호 석암이 석당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하고 오늘 다시 생각해 봅니다.


                구고연금(求古硏今).  석당 김종호. 1977.


<구고연금(求古硏今)>은 서재의 높은 곳에 두면서 오랫동안 <(구고연재(求古硏齋)>로 읽혀졌다. 마지막 글자는 당연히 집 ‘재(齋)’로 읽어져 ‘옛 것을 찾고 연구하는 집’ 정도로 생각하고 흡족했다.『논어』에서 공자의 학습방법인 호고민구(好古敏求)을 연상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2018년 ‘고서화 감상회’에서 전시하고 싶다는 의사가 있어 응하면서, 집 ‘재(齋)’가 너 이(尒)가 아닌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고 보니 자형으로 보면 너 ‘이(尒)’같이도 보였다. 그러면 의미는 ‘옛 것을 찾고 연구할 뿐이다’로 해석할 수 있는데, 영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구고(求古)’는 전고가 있고 ‘연이(硏尒)’는 자형은 비슷하지만 의미로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전시회는 일주일 정도 남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여 신음(呻吟)하고 있었다. 고서화 감상 좀 한다는 모임에서 도록에 엉터리로 기록할 수는 없다. 전시일이 거의 다 되어서 대구(對句)로 맞추면 지금 ‘금(今)’이 맞을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옛 것을 찾고 지금을 연구 한다’는 의미적으로도 잘 어울린다. 그렇지만 ‘금(今)’이 맞다는 증빙자료가 없다. 당연히 기초적인 자료로 옥편이나 초서사전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금서실(琴書室).  석당 김종호.


  이곳저곳을 찾고 있는 우연히 석당의 <금서실(琴書室)>이란 작품을 보게 되었다. <금서실(琴書室)>의 거문고 ‘금(琴)’자 밑에 지금 ‘금(今)’이 <구고연금(求古硏今)>의 마지막 글씨가 지금 ‘금(今)’이란 증빙자료이다. 석당은 지금 ‘금(今)’을 이렇게 썼던 것이다. 이 작품은 장식이 없는 액자에 무게를 느끼지 못할 정도의 나무 쫄대 만으로 옛날 모습이다. 한옥의 낮은 천장에 올려놓았음 즉하다.

그러면서 진(晉)나라의 서법가 색정(索靖, 239~303)의 서첩에서 지금 ‘금(今)’을 이렇게 쓴 것을 확인하였다. 무엇이든지 쉽게 나타나는 경우는 없다. 노력한 후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김영숙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석당은 술을 좋아하고 호탕하여 글씨를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에게나 글을 써주었는데 현판 글을 쓸 때 대필이 없으면 작은 붓 두세 개를 고무줄로 묶어 큰 글자를 썼다고 한다. 붓을 직접 만들어 썼다고 한다. 특히 서수(鼠鬚)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쥐의 수염으로 붓을 만들어 쓴 듯한 <구고연금(求古硏今)>이나 <금서실(琴書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처음과 끝부분의 획이 고르지 않은 것은 작은 붓을 묶어서 쓴 때문이다. 또 독특한 서법인 절목체(折木體)라 하여 한 획에 3번을 꺾는 기예로서 내리긋고 삐치는 획의 움직임을 절묘하게 운용하는 필체를 말한다.

  절목체에는 ‘경사입초’(驚蛇入草, 놀란 뱀이 황급히 풀숲으로 들어가는 것), ‘비조출림’(飛鳥出林, 새가 수풀에서 날쌔게 날아오르는 것) 하는 것 같이 써야만 절목체가 형성된다고 했다. “글씨의 생명은 획에 있다.”라는 것이 석당의 지론임에 비추어 수긍이 가는 말이기도 하다.

석당의 현판 글씨는 ‘누대정각방명부현판(樓臺亭閣芳名簿懸板)’이란 자료 속에 목록들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여기에 따르면, 영주 부석사 <안양루>, 예천 용문사 일주문 <소백산 용문사>, 중국 절강성 하진무(夏震武)의 <영봉정사(靈峯精舍)>, 일본의 <진충사(盡忠祠)> 등 전국에 걸쳐 대략 160점의 작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