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문흥동(文興洞), 도리원(桃李院)
의성 봉양면 문흥동(文興洞)에는 자연부락으로 판항리(板項里)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처음 정착하여 골 안에 널판 재목으로 쓸 수 있는 숲이 울창한 것을 보고 ‘널목(板項)’ 또는 ‘판향(板鄕)’이라고 불렀다. 원래는 장씨(張氏)가 살았으나 그 후 아주 신씨(申氏)가 입향하였다.
문흥동은 자연부락으로 글흥골, 문흥리, 너덜, 새마실, 무랭이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은 작은 도서관이 건립되었으니 글 읽는 소리가 낭랑(朗朗)하게 들리니 옛 이름 문흥(文興)이 거짓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판항리에 사람이 살아 온 것은 500여년이 넘은 오래 된 마을로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이 고을을 지나면서 판항리 백성들은 산꼭대기에 육십여 호가 모여 사는 것이 요순시대의 백성같다고 하였다.
의성의 서쪽 판항리에 백성의 집 육십여 호가 모두 산꼭대기에 있다.[義城西板項里民居六十餘戶皆在山頭]
옹기종기 초막집들은 구름 속에 들어 있고 / 衡茅點點入雲煙
망아지 송아지 닭 돼지는 돌밭에 흩어졌으니 / 駒犢雞豚散石田
응당 이는 요 임금 백성이 홍수를 피해 왔기에 / 應是堯民避洪水
자손들이 서로 산꼭대기에 살자고 경계했으리 / 子孫相戒在山巓
도리원(桃李院)은 조선시대에 역원이 있어서 도리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봉양(鳳陽)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곳에 경산에 사는 남주(南洲) 채헌기(蔡憲基, 1890~ 1963)가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도리원[桃李院]
도리원에는 복사꽃과 오얏꽃이 피었으니 / 桃李院中桃李開
지팡이 잠시 놓고 바위 옆 대에 올랐다. / 投筇少憩石邊臺
한 봄에 경치 찾으니 시가 천 구절이고 / 一春探景詩千句
십리에 근심 잊고 술 수십 잔이네 / 十里忘憂酒數盃
새 우는 소리 시끄러운데 산위의 해는 길고 / 啼鳥聲聲山日永
맑은 시내 골짜기마다 나그네 수레 부른다. / 淸溪曲曲客驂來
또한 이 부근이 선경인 것을 알겠노라 / 也知仙境於斯近
양 언덕에는 흰 모래와 푸른 이끼가 있으니/ 兩岸明沙又綠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