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으로 동짓달 스무이레 오늘은 생일이다. 어머니 날 기르느라 마음고생이 얼마나 많으셨을까. 술잔 한잔 올리지 못하고 밥상을 받으니 만 가지 상념이 생긴다. 2019년 새해 이튼 날 밤이 남아서 일어나 앉았다. 정신은 맑아지고 편안한 잠을 잤다. 간야도명(簡野道明, 1865~1938)의 1934년판『보주논어집주』한권이 도착했다. 손상된 책을 명주실로 꿰매고 헝겊을 붙여 보수하였다. 20대에 만난『논어』를 오늘까지 읽는다.
노나라의 대부 숙손무숙은 조정에서 대신들에게 ‘자공이 중니보다 훌륭하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이는 자공을 높이고 공자를 깎아내리려는 것이다. 공자가 죽은 뒤의 일이라 자공은 더욱 슬펐다.
자공은 궁궐담장에 비유하여 말하였다. 나의 담장은 어깨에도 못 미쳐 집안의 좋고 나쁜 것이 다 엿볼 수가 있다. 그러나 스승의 담장은 몇 길이나 되기 때문에 문을 찾지 않으면 궁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고 종묘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온갖 건물이 많이 들어 차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은 사람은 적다. 그러니 숙손무숙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곡부 공부(孔府) 정문에 ‘만인궁장(萬仞宮牆)’이란 글자가 높이 걸려있는 이유가 ‘공자의 궁궐 담장은 만 길이 된다’에서 온 것이다. 궁궐담장이 높고 집안이 넓기 때문에 문을 찾아야 한다. 그 문을 제대로 찾아 들어가는 이가 적으므로 집안까지 들어가는 일이 어려운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문을 찾아 문 앞에 만이라도 간다면 ‘문하생(門下生)’이 되는 것이다.
숙손무숙이 계속하여 중니에 대해 험담을 했다. 논어에서는 무슨 나쁜 말을 했는지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도 듣고 넘기고 문자로 기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말은 일시적이지만 문자로 기록하면 천만년 전달되어 혹 잘못 배운 후인이 본받을 수도 있다.
자공은 말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스승을 험담해서는 안 됩니다. 일반인 가운데 현명한 사람은 구릉과 같아서 넘어 갈수 있지만, 중니는 해와 달과 같아서 넘어 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비록 해나 달을 스스로 헐뜯고 관계를 끊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해와 달에 손상이 미칠 수 있겠는가? 다만 자신의 분수를 모른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이 문장에서 1935년 조선유학회에서『일월시보』란 잡지가 창간되었다. 그 사람의 지혜가 깊으면 깊을수록 공자를 이해하는 정도도 더욱 깊어진다. 그 학문이 도달한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공자를 존경하는 정도도 더욱 지극해지는 것이다.
이 와중에 자공의 제자 진자금도 말을 보태었다. 스승은 왜 그렇게 겸손합니까? 중니가 어떻게 스승보다 현명하단 말입니까? 진자금은 말을 함부로 하지 말게나. 군자는 말 한마디로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고, 말 한마디로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말이란 신중하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스승에게 미칠수 없는 것은 마치 사닥다리로 하늘에 오를 수 없는 것과 같다. 스승이 만약에 국가를 얻어 다스릴 기회가 있었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백성의 생계를 세워주려고 했다면 바로 세웠을 것이고, 백성을 덕으로 이끌고자 했다면 바로 따랐을 것이고, 백성을 위로했다면 바로 다가왔을 것이고, 백성을 동원하려고 했다면 그들은 바로 합심하여 협력했을 것이다. 스승은 살아서는 영광스러웠고 돌아가셔서는 큰 슬픔을 남겼는데, 내가 어떻게 그 분에게 미칠 수 있겠는가?
군자는 한마디 말만 가지고도 무엇을 알고 무엇을 알지 못하는지 알 수 있다. 말하는 데 있어 정말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이어서 명확하게 말했다. 공자는 높아서 자신이 미칠 수 없다고, 공자가 만약 제후의 정사를 맡았거나 혹은 대부의 일을 맡았더라면 분명히 세워야 할 것은 세웠을 것이고, 실행해야 할 것은 실행했을 것이며, 멀리 있는 사람이 와서 복종하고, 한사람이 부르면 백사람이 호응했을 것이다. 그 분은 살아서는 영광을 얻었고 죽어서는 마음속으로 사모하고 지극히 공경한다.
산 사람에게 험담이나 욕을 하는 것은 변명할 수도 있고 막아낼 수도 있다. 죽은 사람은 말할 수도 막아 낼 수가 없다. 죽은 사람은 가장 힘이 없으면서 움직일 수도 대항할 수도 없다. 죽은 사람을 험담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다.
공자의 상을 당하여 제자들은 상복은 입지 않았지만 부모를 잃은 것과 같이 마음으로 심상(心喪) 3년을 하였다. 그러나 자공은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3년을 더하여 6년 심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자가 죽은 뒤 공자를 지킨 사람은 자공이었다.
<보주 논어집주> 간야도명(簡野道明). 1934
<일월시보> 제6호, 조선유교회. 1936. 『논어』자장편, “중니는 해와 달 같아서 넘어설 수없다.(仲尼 日月也 無得而踰焉)”에서 일월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