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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의 전가보물 ‘소(素)’

둔굴재 2022. 8. 26. 22:19

 안동김씨가 처음 터를 잡은 곳은 태사공 이후 안동부내 수남 강정촌(江亭村)이다. 지금의 귀래정 자리로 추정한다. 그 후 풍산현 불정촌(佛頂村)에 옮겨 살았다. 지금의 풍산현 시장 오른쪽 수곡이다. 지금의 소산 마을에 정착하게된 것은 비안현감 김삼근(金三近, 1419~1465)이 둘째 아들 김계행(1430~1517)이 출생한 이후에 옮겨와 살면서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금산촌(金山村)이라고 하였다. 이 때에 돈소당이란 당호도 사용하게 되었다.

돈소당 뒷산은 표고 100m 정도의 구릉으로 금산(金山)으로 불리어졌으나,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병자호란으로 낙향하여 김가(金哥)가 사는 곳을 금산이라 하면 이는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모름지기 검소하다는 소산(素山)으로 바꿔야 한다 하여 소산으로 바꾸었다. 소산은 소요산(素耀山)를 줄여서 부른 것이다. 소박함이 빛나는 마을이다. 김은 금()이므로 조용히 겸손하여도 화려하므로 검소한 것을 강조하였다.

청음은 <시조 태사공의 일을 읊다>는 시문에서 한시절의 대려(帶礪) 1)는 공신 집안의 일로 돌아와 청백이 가문에 전해 오길 팔백년이 되었다.”고 읊었다. 팔백년은 시조 태사공으로 부터 청음까지로 안동김씨의 전가 보물인 청백은 태사공 부터 가문에 전통으로 전해졌다는 이야기이다. 청백을 이어온 김가가 사는 곳을 사치스럽다고 생각하여 금산에서 검소하다는 소산으로 바꾼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안현감 김삼근의 당호는 돈소당(敦素堂)이다. ‘소박한 것을 돈독하게 하다는 뜻이다. 돈소당 기문이나 기록이 부족하여 정확한 의미는 새길 수 없지만 크게 무리는 가지 않을 것이다. 부족한 자료에서 1차적으로 보여 지는 것은 비안공의 휘() 삼근(三近)중용20장에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지혜에 가깝고 힘써 행함은 인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기에 가깝다.”을 말하는 것이다. 삼근은 호학(好學), 역행(力行), 지치(知恥)를 가르키는 말이다. 즉 학문을 좋아하고, 힘써 행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안동김씨의 전가보물 소()는 학문에서 찾을 수 있다. 논어팔일편에 자하가 시경의 아름답게 웃는 모습에 보조개를 보이며 아름다운 눈은 흑백이 분명하구나. 흰 바탕 위에 찬란한 색깔이로다.(巧笑倩兮 眉目盼兮 素以爲絢兮)는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공자는 말씀하셨다. “그림 그리는 것은 바탕을 희게 한 다음 일이다.(繪事後素)”하였다. 흰색으로 색채를 삼는다는 소이위현혜(素以爲絢兮)와 그림 그리는 것은 바탕을 희게 한 다음 일이다는 회사후소(繪事後素)()’는 흰색이고 소박함이고 ()’은 여러 가지 색깔로 화려함이다. 회사후소는 예기에서는 흰 바탕이 색깔을 받아들인다하였다. 내적인 아름다움을 먼저 갖춘 다음에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꿀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소박함으로 아름다움을 삼는 것이 안동김씨의 전가보물이다. 비안현감 김삼근의 전가보물 ()’는 둘째아들 보백당 김계행의 청백으로 이어진다. “우리 집에 보물이란 없으니,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에서 ()’는 청백의 소박함으로 이어졌다. ‘()’를 부적같이 생각하여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청음이 금산을 소산으로 마을이름을 바꾼 것은 이런 근거에 의한 것이다.

보백당의 청백정신은 구전 김중청에게로 이어졌다. 중청은 논어미자편에서 공자가 일민(逸民) 우중(虞仲)과 이일(夷逸)자기 몸을 깨끗이 했고, 관직을 버린 것은 권도에 맞았다.(身中淸 廢中權)”하였다. 일민이란 산림에 숨어살면서 벼슬에 나가 관리가 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김중청의 이름은 논어신중청(身中淸)’에서 나온 것이다. ‘중청청백에 맞다는 뜻으로 5대조 보백당 김계행의 청렴결백을 가정의 법으로 여기고, 공경하고 검소함을 대대로 지키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구와 사이가 도탑고 서로 화목하여라. 내 집에는 보물이 없다. 보물은 오직 청렴결백뿐이다.(家傳淸白 世守恭儉 孝友敦睦 吾家無寶物 寶物唯淸白)”는 청백정신을 래손(來孫) 중청이 이어 받은 것이다.

보백당의 아들 김극례가 봉화에 입향하여 손자 김정헌이 퇴계학을 수용하여 손자 김중청이 퇴계의 문인인 조목과 정구에게 수학하여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학문적 요체는 보백당의 청백정신을 전승하는 것이다.

이름 중청(中淸)’과 자 이화(而和)’를 연결하면 청백에 맞게하고 그리고 화목하게 한다.’이다. 너무 청렴결백하게하면 사람들과 화목하게 어울리기가 어렵다. 맑은 물에 물고기가 살기 어려운 것과 같이 그래서 접속사 이()를 이름에 연결하여 화목으로 하였다. 세상에 나아가 아호 구전(苟全)을 갖게 된 것은 진실로 청백()과 화목()을 온전하게 실천하였다이다.

 

또 하나의 소()는 양소당(養素堂)이다. 동야 김양근(金養根, 1734~1799)<양소당기>에 의하면 ()’는 안동김씨의 전유물임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질실순고(質實純古)’의 의미이다. ‘질박(質朴)하고 참되며 깨끗하고 예스럽다는 의미다. ‘창연고색(蒼然古色)’이라고도 하였다. 창연은 푸른 것으로 맑고 욕심 없는 청백한 것이다. 그러면서 고색한 옛 모습을 잃지 않는 것이다. 본래의 바탕색을 잃지 않으면서 욕심없는 맑은 푸른빛이기를 바란다.

논어사람의 본바탕이 문채로 가리면 야만스럽고, 문채가 본바탕으로 덮으면 형식적이 된다. 문채와 본바탕이 균형을 이루어야 비로소 군자가 된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하였다.

 

이후의 종가의 선조들은 자신의 아호에 ()’자를 넣어서 소박함을 실천하기를 좋아하였다. 동야의 종 6대조 김숙(金塾)의 호는 소애(素厓), 5대조 김계상(金啓祥)은 소은당(素隱堂), 종 증조 부호군 김인석(金麟錫)의 헌호는 소리옹(素履翁)이고, 방계의 친척 상사공 김상동(金相東)의 자호는 망소(望素)로 한 것은 김삼근은 호학(好學), 역행(力行), 지치(知恥)에서 나오는 전가보물 ()’를 계승하겠다는 뜻이리다.

안동김씨의 ()’는 흰색이며 소박하고 검소한 것이다. 벼슬을 하면 청백으로 나타난다.

 

 

  1)  대려(帶礪): 임금이 공신의 집안을 영구히 변치 않고 대접한다는 맹세의 말. 한나라 고조가 봉작한 서사(誓辭), "황하가 띠[]와 같이 작아지고, 태산이 숫돌[]과 같이 평지가 되도록 나라에서 영구 보존하리라." 한 데에서 나온 말.

 

김상헌 <청음집> ...<詠始祖太師事 示同宗諸君>&nbsp;&nbsp; 淸白傳家八百年
율산 리홍재  <素以爲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