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데서 명당 찾지 마시고 봉황이 나는 비봉산에서 명당을 찾아 보심이 어떨런지요? 남의 고향을 많이 돌아 다녀 봐야 내 고향 좋은지 알지요.
다인多仁 비봉산 팔명당
예로부터 비봉산에는 여덟 군데의 명당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만큼 비봉산은 이 지방에서는 명산인 것이다. 이 산자락에 의지하고 사는 마을 마다 인물이 없는 마을이 없고, 명당 아닌 곳이 없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다 명당인 것이다.
비봉산의 좌로는 독점산(獨店山)과 문암산(門巖山)이 사붓테 둥굴재를 지나 천지봉, 비릇재로 긴등이 서남으로 뻗어서 위강에 이르고, 우로는 죽령산(竹嶺山), 문등산(文嶝山), 연담산(蓮潭山)이 낙동강을 감돌아 흰티재 넘어 소이산, 구월봉으로 낮아지면서 비산비야(非山非野)라하여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니어서 “많은 봉우리가 둘러앉아 두 손을 맞잡아 서 있음이 마치 장막 밖에서 여러 명의 선비와 손님이 강의를 듣는 것 같다.” 고 외산 류시봉은 <낙파정기>에서 적었다.
문화유적지표조사에 의하면 신석기 시대 제사 의식의 흔적인 성혈(星穴)이, 고분군이 평림동 고분군, 송호동 고분군, 달제동 고분군, 양서동 고분군, 봉정동 고분군, 덕미동 고분 등 고분 171기가 산재 해 있으며, 고분은 높은 산을 접하며 낙동강변에 위치하며 해발 100~200m 미만의 능선이나 구릉지에 있다.
비봉산 대곡사는 대웅전, 명부전, 요사채, 범종각 등으로 ㅁ자형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으며 그 중앙 정원에 다층청석탑이 안치되어 있다. 현재는 한 개의 암자 적조암을 가지고 있으나 한창 번성하던 시절에는 아홉 개의 암자을 갖고 있었다한다. 즉, 구암, 염불암(念佛庵), 회동암, 적멸암(寂滅庵), 원적암(圓寂庵), 보덕암(寶德庵), 양진암(養眞庵), 적조암(寂照庵), 봉서암(鳳捿庵)이다.
적조암은 가람이면서 구포루(九苞樓)라는 누각을 갖고 있으며, 적조암 앞에는 지형이 만삭 임산부 모습이어서 암자가 생기기 이전부터 민간에서는 자식 생산이 어려운 부인은 소원하였고, 문필봉이 앞에 있으니 학문하는 선비들의 독서 장소였다. 실제로 산신은 기도를 들어주어 그 효험을 이야기 하는 사람은 그 수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다인에는 유명한 감여가도 많다.
다인에는 대곡사 외에도 모창의 선악사(仙嶽寺), 평림의 고오사(古吾寺), 금릉의 고장사(古莊寺), 신락의 구토사(九土寺), 산내의 불당사(佛堂寺) 등 폐사 된 사찰 이름 다섯이 전하고, 덕미에는 미륵불상을 모셨고, 덕지 여호우리 고개밑 절터, 양서 탑등산(塔嶝山) 넘어 중산골 절터, 달제 김제의 절터, 모창 절탑골 절터, 신산 밋골 가원리 절터 등 이름도 모르는 폐사지도 여섯 군데가 전한다.
학교로는 다인향교는 평림의 교리골에 있었으며, 봉산서원, 봉악서당, 봉남서당이 그리고 박응형(朴應衡)의 남고정사(南皐精舍)가 있었다.
한적한 고을에 장군 임지한(林支漢), 대흥이씨의 시조 이연계(李連桂), 괴정(槐亭) 정휘(鄭輝),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 학서(鶴捿) 류태좌(柳台佐), 의흥현감 신응지(申應之), 낙파(樂波) 김용한(金龍漢), 정산(靜山) 김용하(金溶夏)의 산소가 비봉산에 기대어 있다.
명당을 보는 감여가(堪輿家)의 일화도 많이 전하며 감여가들은 비봉산의 명당을 찾아 대표적인 곳을 팔명당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남양인 홍성지(洪性智. ?~1623) 도사가 명당 세 군데를 알려주었는데, 다인진두(多仁津頭) 뒷산 해나무 밑을 보고 구대청춘일유복(九代靑春一遺腹)이라 “구대청춘의 명당 한 곳이 산등성이에 남아있다.” 하고, 양곤 서원등을 건너보고 비봉포란(飛鳳抱卵)이라 “봉새가 알을 품었구나”하였으니 옛날 비봉산이 생길 때 한무더기 흙더미가 불쑥 솟아 얌전하게 좌정하였다. 지금도 서원등 앞들을 알밑들이라 한다. 반장 뒷산을 바라보고 선인반장(仙人反掌)이라 “신선이 손을 뒤집었구나”하였는데 지금도 반장이라 부른다.
역학가 송오동은 비봉산 정상에 성뜰이라고 하는 성터가 있다. 후백제의 견훤이 웅거하기위해 산성을 쌓았으며 성터 안에는 샘이 있어 큰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했다. 임지한 장군도 호랑이를 타고 다니며 비봉산에서 말과 화살이 누가 빨리 달리나 하고 군사훈련을하였다한다. 1761년 정태래(鄭泰來)가 지은 <유비봉산기>에도 “옛날 성 위에 나지막하게 쌓은 담을 두루 만날 수 있으며 지금도 완연하며 삼국이 서로 다툴 때 축조한 것이다.”고 하였다.
삼국시대에 쌓은 비봉산 산성
평림 고현은 마을 중앙이 솥뚜껑을 엎어 놓은 듯 불룩하여 자라등 같다하여 천오낙지(天鰲落地) “하늘에 있는 자라가 땅에 내려 앉았다.”하였고, 도암의 도구마을 동쪽에 산등이 말처럼 생겼다하여 동마암(東馬岩)부르며 서쪽등 넘어는 여(驢)등골이라 한다. 마신두(馬身頭)는 말머리이고 도마미(陶馬尾)는 말꼬리 이다. 여등은 말등이니 다인 중 고등학교가 말 등에 놓였으니 기마형 도약의 기상이니 다인의 비봉산의 정기를 받은 무수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다.
거미내 마을 뒤 평림산 일대가 와우형(臥牛形) “소가 여물을 먹고 쉬는 모습”이라한다. 마을 왼쪽 등은 가마등이고 안쪽의 골은 삼정골, 오른쪽 등은 비봉산에서 길게 뻗은 등이 마구등이다. 마굿간이 있고, 죽 끓여 주는 가마(釜)가 있고, 소나 말의 추위를 위해 입히는 삼장이 있으면 진짜 소나 말은 어디 있는 걸까? 그러나 넓은 산에 명당은 과연 어디일까? 명당은 아직 찾지 못하였으니 지리는 참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인물은 계속 태어난다.
차돌배이의 강자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