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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진사 광산 김공(휘이원) 묘갈명배 의인 의성김씨

둔굴재 2023. 5. 29. 11:35

소재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탁본일시: 2023 5 19

 

공의 성은 김이요 이름은 이원(以元)으로 초명은 만회(萬會)요 자는 동언(東彦)으로 광산인이다. 신라왕자 흥광(興光)이 시조이다. 그 후 벼슬이 끊어지지 않고 대대로 이어졌다. 전하여 21세 철산(鐵山)께서 조선 태조조 승의랑 사헌부감찰이었으며, 증직으로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광성부원군이다.

 

 이분이 겸광(謙光)을 낳았고 호는 서정(西亭)으로 성종 신묘(1471)에 순성명량좌리공신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광성부원군에 책봉되었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증직으로 숭정대부 위정부 좌참찬 겸지경연사 세자이사이며,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이분이 극핍(克愊)을 낳았고 문과 급제하여 숭정대부의정부 좌찬성이며, 증직으로 순충보조공신 숭록대부 광악군으로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이분이 명윤(明胤)을 낳았고 문과 급제하여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광평군이다. 이분이 흥서(興瑞)를 낳았고, 호는 송재(松齋)로 통훈대부 장예원 사평을 지냈으니, 공의 5대조가 된다. 고조는 과의교위(果毅校尉) 덕린(德麟)이며, 증조는 자빈(自鑌)은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하여 크게 성취한 바가 있었으며, 병자호란을 당하여 연산현감 김홍익(金弘翼)과 함께 경기도 협천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이런 일은 연산읍지에 실려 있으며 후에 판부사 이상진(李尙眞)이 상계하여 창신교위 훈련원판관에 증직되었다. 할아버지는 통덕랑 희영(喜榮)이다. 아버지는 훈겸(勳兼)이고 어머니는 연안이씨로 문창(文昌)의 딸이다.

 공은 선조 무인(1578)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총명하고 재주와 기량이 남보다 뛰어나 크게 공보(公輔)의 명망이 있었는데 다만 상상(上庠)에 그쳤으니 이를 애석하게 여긴 사람이 많았다. 시절이 잘못되어 감을 보고 충청남도 연산에서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으로 거처를 옮겨 자리를 잡으니, 즉 장인의 고향이다. 이로부터 자연[林泉]에 자취를 숨기고 벼슬에 나아갈 뜻을 끊고 거문고와 책으로 스스로 즐겼다. 세상의 혼탁함을 잊었으니, 여기에서 공의 뜻이 범상함을 알 수 있다.

뜻밖에 35세로 세상을 하직하니 이때가 임자년(1612) 47일이다. 묘는 안평면 박곡 술좌이다. 배위는 의성김씨로 아버지는 대려(大麗)이다. 묘소는 공과 더불어 합부하였다.

 아들 진민(鎭敏)을 낳았으며 황간김씨 필홍(泌弘)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 성택(成澤)을 낳으니, 성택은 용궁전씨에게 장가들어 네 아들 상진(相震), 상태(相泰), 상주(相珠), 상우(相佑)를 낳았다. 상진은 아들 기병(箕丙), 상태는 아들 기수(箕壽), 상주는 아들 기선(箕璇), 기도(箕道), 기체(箕體), 상우는 아들 기철(箕喆), 기발(箕發), 기현(箕顯)을 낳았다. 현손과 증손 이하는 번성하여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아! 공이 돌아가신지 이미 3백여 년이 되었으나 묘도에 아직 비석이 없어서 후손들이 한스러움을 간직한 것이 어찌 다함이 있었으리오. 이에 금년 가을에 7대손 영주(永主)와 주손 성중(成中)이 여러 친족의 의견을 모아 비로소 옥돌에 비갈을 세우려고 달구벌의 집으로 나를 찾아와 비석에 새길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비문을 짓기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며, 또한 근거할만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고사했으나, 정성스런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려워 오른쪽과 같이 대략을 서술하고 이어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름답도다. 광산 김씨여!

신라의 왕으로부터 시작하였네.

이름난 석학이 잇달아 일어나고

높은 벼슬한 분이 연달아 계셨네.

공이 그 자취를 이어받아

재주와 기량이 비상하였네.

천명이 상상(上庠)에 머무르니

누구인들 한탄하며 상심치 않으리오.

기미를 알고 관직에서 즉시 물러나서

산림 속에서 수양하고 은거하셨네.

안평 박곡의 산기슭에

유택이 있다네.

비로소 비석을 세우니

천년세월을 기약하네.

 

광복 후 갑자(1984) 10월 일

광주 이능환 짓고 아울러 쓰다.

 

成均進士光山金公之墓

配宜人義城金氏

 

公姓金 諱以元 初名萬會 字東彦 光山人 新羅王子興光 其初祖也 厥後冠冕 連世不絶 傳二十一世 有諱鐵山 入鮮 太祖朝 承議郞司憲府監察 贈純忠積德秉義 補祚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事 光城府院君 是生諱謙光 號西亭 成宗辛卯 策純誠明亮佐理功臣 正憲大夫 議政府左參贊 光城君 選淸白 贈崇政大夫 議政府左參贊 兼知經筵事 世子貳師 諡恭安 公是生諱克愊 文科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 贈純忠補助功臣 崇祿大夫 光嶽君 諡平靖 是生諱明胤 文科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 光平君 是生諱興瑞 號松齋 通訓大夫 掌隸院司評 是爲公五代祖 高祖諱德麟 果毅校尉 曾祖諱自鑌 受學于沙溪門 大有成就 當丙子亂 與連山縣監 金弘翼 同進 交戰于京畿峽()川 以身殉國 事載連山邑誌 後因判府事 李尙眞啓 贈彰信校尉 訓練院判官 祖諱喜榮 通德郞 考諱勳兼 妣延安李氏文昌女 宣廟戊寅 公生 生而穎悟 才器過人 大有公輔之望 而只一上庠而止 人多惜之 見時事日非 自忠南連山 移接于慶北義城安平面 卽聘鄕也 自是遯跡林泉 絶意進取 琴書自娛 頓忘塵世之混濁 於此可知公志尙之超倫也 居然以三十五壽 終于世 是在壬子四月七日也 墓在安平面博谷戌坐 配義城金氏父大麗 墓與公合祔 生一男鎭敏 鎭敏娶黃澗金氏泌弘女 生一男成澤 成澤娶龍宮全氏 生四男 相震相泰相珠相佑 震男箕丙 泰男箕壽 珠男箕璇箕道箕體 佑男箕喆箕發箕顯 玄曾以下 繁不盡錄 噫公之沒(歿) 世已經三百餘載 墓道尙闕樹石 後仍之齎恨 曷有窮已 迺於今秋 七代孫 永圭與冑孫成中 合謀諸族 始擬竪表珉 而訪余于達句寓舍 請以顯刻之文 不惟我非其人 亦無遺事之可據 固拒而難負誠囑 略敍如右 系之爲銘

 

銘曰

猗歟光金 肇自羅王

名碩踵起 簪組聯芳

公繩厥武 才器非常

命止上庠 孰不咨傷

知機卽退 林樊修藏

朴谷之麓 託其幽堂

始竪一石 庶期千霜

 

國復後 甲子 十月 日

廣州 李能煥 撰竝書

성균관진사 광산 김공지묘, 배의인 의성김씨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