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국(李忠國, 1715~1777)의 자는 효이(孝而), 호는 회우(悔尤). 본관은 진성이다. 고조는 주봉[柱峰] 이래[李崍]이다.
이충국의 이름은 충국[忠國], ‘나라에 충성한다’이다. 왕조시대의 ‘국[國]’은 나라이면서 국가이며 임금이다. 나라에 충성하다보면 가정에 효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자가 효이[孝而]이다. 충과 효의 조화를 맞춘 것이다. 이름이 부족한 것을 자명[字名]이 보태어주고 이름이 넘치는 것을 자명이 덜어내어 주면서 이름과 자명은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있다.
이충국의 아호 회우[悔尤]는 1838년 류도헌이 찬술한 묘갈명에서 “1767년에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집에 있기를 10년 동안 비록 세상에 도움은 되지 않더라도 뉘우침과 허물의 뜻으로 문미 위에 ‘회우’라고 편액하였다. 뉘우침을 적게 하고 허물을 적게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하였다.
회우의 자세한 근원적인 것은 『논어』 위정편에 자장이 녹봉을 구하는 것을 배우려하자 공자가 말했다. “많이 듣고 의심스러운 것은 빼놓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말한다면 허물이 적으며, 많이 보고 미심쩍은 것을 빼놓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행동한다면 후회할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후회할 일이 적으면 녹봉이 그 가운데 있다.”하였다.
언과우[言寡尤] 행과우[行寡悔]라 하여, 말하는데 허물이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다에서 회우[悔尤]가 나온다. 말과 행동을 신중하게 하라는 것이다. 남의 말을 많이 듣고[多聞] 남의 행동을 많이 보다[多見]에서 견문[見聞]이란 단어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충국의 고조 주봉[柱峰] 이래[李崍]는 대곡사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서애선생의 시문에 차운하였다. “맑은 바람은 나무그늘에서 불어오고 온갖 꽃들은 향기롭네. 인간세상을 떠나고 싶어 오랫동안 방황하였고. 49년간 삶이 잘못되었고 한밤중에 생각은 길기만하네.”하고 읊었다.
49년은 춘추시대 위나라 거백옥은 나이 50에 49년간이 잘못된 것을 알고 잘못을 고쳤다는 고사가 있다. 고조가 시를 읊던 대곡사에서 현손 이충국이 동갑계회를 대곡사에서 하였다. 예천군수 심용(沈鏞)이 참석하여 시를 읊었으므로 시문에 차운하였다. “같은 나이에 즐기는 일은 이미 무궁하고 또 명년 봄을 기다리며 새소리를 듣는다.”하였고, 용문에 세거하는 정재희(丁載熙)도 참석하여 시문을 지으니 차운하였다. “선방 창문에 시흥은 다하지 않고 배에 가득실고 돌아오네. 신선대에 봄이 오면 손잡고 가서 술잔을 기울이세.”하였다.
정재희의 선조 정윤우(丁允祐, 1539~1605)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신종황제로부터 버들잎 모양의 유엽배(柳葉盃)를 하사받았다. 구리에 황금을 혼합하여 만든 것으로 정씨 집안에서 혼례 때 술잔으로 사용하고 있다. 7세손 정재희가 칠언율시를 짓고 사방으로 차운시를 구하여 시집을 엮었다. 후손들은 유엽배를 보여주고 시문을 청하며 경사를 후대에 까지 나누었다. 『초암실기』에는 149명의 시문이 남아 있다. 오늘의 유엽배는 예천박물관에서 보관하여 관람할 수 있다.
이상정의 문인 김굉의 아버지 김광헌(金光憲)과 대곡사에 들러 시문을 지으니 세 번이나 대곡사에 들렀다.
풍양 경주손씨의 달관자 손흥지의 용두정에서는 백담 구봉령의 시문에 차운하고, 1774년 8월 또 용두정에 올랐다가 비에 길이 막혀 무료하여 시를 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