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屯說] 김해에 있는 대부교는 김해지역과 죽도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죽도는 당시 무인도였지만 전쟁에 쓰이는 전함과 배로 실어 나르는 곡식을 쌓아두는 곳간인 조창이 있어서 다리가 없이 출입하는 주민들이 불편해 하였다. 김해부사 황호(黃鎬)가 을유년에 석재로 다리를 축조하고 김해지역의 문장가 정옹 조구령이 사실을 <대부교비문>을 지었다.
김해부 남쪽으로 5리쯤에 ‘대부(大夫)’라는 포구가 있는데, 그렇게 이름을 붙인 의미는 전하지 않지만, 어쩌면 ‘복야파(僕射坡)’나 ‘낭관호(郞官湖)’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나무를 베어다 다리를 만들어 죽도와 통하게 하였는데, 죽도는 곧 전함(戰艦)을 보관하고 조창(漕倉)을 설치해 둔 곳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날로 이어지는데, 비바람에 썩어 무너져 몇 년에 한 번씩 개수하니, 사람들이 모두 불편해하였다. 그래서 자선가 박기립(朴起立)이란 사람이 석재로 바꾸고자 하였으나, 공사가 크고 힘은 모자라 세월이 가도 거행하지 못하였다. 이때 김해 부사 황호(黃鎬)가 이 사실을 듣고 애석해하여, 비장 가운데 이 일을 주관할 수 있는 유천점(劉天點)을 뽑아 일을 주관하게 하고 재력을 돕게 하였다. 을유년 2월에 시작한 것이 몇 달 만에 완성을 보았으니, 이는 백성을 구제하는 넉넉한 정치라고 하겠다. 이제 사람들이 편리하게 강을 건너게 되었고, 옷을 벗어 들거나 걷어 올리는 불편을 겪지 않게 되었으니, 이는 박기립의 공로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새기는 것이 이 돌에 새기는 것과 같은 것이니, 장대한 일이 아닌가!
大夫橋碑文
府南五里許 有浦曰大夫 命名之義無傳 抑亦僕射坡郞官湖之類歟 刊木爲橋 以通竹島 而竹島 卽藏戰船置漕倉之所也 人之往來 日絡繹 而風雨以之杇傷變 數年一改 人皆病之 有善人朴起立者 欲代以石 事鉅力綿 積歲月未擧 府使黃侯鎬 聞而惜之 於褊裨中 得能幹人劉天點 尸其事 助財力 (役遊手 □□□) 始於乙酉二月 數月而告訖 寔濟民之餘政也 於是 人得利涉 不患揭厲 此起立之功 銘諸萬口 與此石同 顧不偉哉
[崇禎丙子後□□月 日][(九行字不明)
[屯說] 조구령(曺九齡 1657~1719)의 생졸년을 참고하면 문장에서 “을유년이 시작하여 몇 달 만에 완성하였다.”고 하면 을유년은 1705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혹여 비문은 을유년에 시작했으니 완공은 병(丙)자 들어가는 간지인 다음해의 병술(丙戌)이라면 1706년이 준공년도일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숭정 병자년[1636년] 이후 □□월[(九行字不明)” 부분과 “(役遊手 □□□)”는 『정옹문집』에는 없는 부분인데 비석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정옹문집』에는 김해지역의 가락국의 거등왕이 칠점산의 선인을 초대하여 바둑을 즐겼다는 초선대, 마늘모양의 산산대(蒜山臺), 금파정, 뢰청각, 사직단기우문, 구지봉기우문, 불모산기우문, 뢰청각(雷晴閣)을 중수하면서 가락국의 문장 쌍어문이 있다는 신어산(神魚山)에서 기둥 돌을 채취하면서 산신에 제사지낸 <제신어산문> 등의 김해지역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 있다.
<정옹문집>의 대부교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