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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농시고』의 석재 서병오의 사군자 제첨

둔굴재 2024. 2. 1. 16:36

 

畬農詩稿

徐丙奎 著. -鉛活字本. - 1930.

22: : 28.8 19.5 cm. -東裝. -四周雙邊, 半郭 21.7 14.4 cm.,

有界, 1128, 註雙行, 上黑魚尾.

自序: 己巳(1929)...徐丙奎.

 

 여농 서병규(徐丙奎)의 아호 여농(畬農)역경무망괘 62효사에 밭 갈지 않고 심지 않아도 수확이 있으며, 밭을 바꾸고 휴경하지 않아도 지력을 회복한다. 이와 같이 밖으로 나가면 당연히 이로움이 있다.”하였다.

 『이아석지(釋地)에 따르면 밭이 1년 된 것을 치()라 하고, 2년 된 것을 신전(新田), 3년 된 것을 여()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치여(菑畬)는 농사용어다. 고대의 농사법에 치()는 불을 놓아 당년에 개간하여 묵혀놓은 묵정밭이고, 새밭은 다음해부터 곡식을 심을 수 있고, 고대의 휴경은 3년이면 휴경하여 지력을 회복하여야한다. ‘여농3년이 되어 지력을 회복해야하는 농사이므로 여농 스스로가 세상에 쓰임이 되기 위하여 휴식해야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농시고에는 석재 서병오의 대나무에 기욱여취[淇澳餘翠], 난초에 원상유향[沅湘遺香], 국화에 동리추색[東籬秋色], 매화에 서호춘몽[西湖春夢]의 화제를 하였고, 주문인 음각 서병오인과 양각 석재’ 2과가 각각의 장마다 날인되었고, 여농서병규시고[畬農徐丙奎詩稿]라고 큰 글자로 한 면씩 적었으며, ‘궁험심득천호일구[躳驗心得千狐一裘] 기사오월 석재병서라고 한 면에 적어 주문인 음각 서병오인과 양각 석재’ 2과가 날인되어 있다.

 

. 기욱여취[淇澳餘翠]의 대나무

 

 첫 번째 그림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가는 대나무를 그리고 우측상단에 화제로 기욱여취(淇澳餘翠)라 하였다. 이는 시경위풍 기욱[淇澳]편을 이해하여야 한다.

 

瞻彼淇澳,    저 기수 벼랑을 보니

菉竹猗猗.    푸른 대나무 무성하도다.

有斐君子,    문채나는 군자여

如切如磋,    잘라놓은 듯 다듬어 놓은 듯

如琢如磨.    쪼아 놓은 듯 갈라놓은 듯하도다.

瑟兮僩兮,    치미하고 굳세며

赫兮喧兮,    빛나고 점잖으니

有斐君子,    문채나는 군자여

終不可諠兮. 끝내 잊을 수 없도다.

 

 기욱편의 기수는 황하의 지류로 하남성의 안양을 흐르는 강이다. 춘추시대 위무공(衛武公)9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 사람들에게 자신을 일깨울 만한 좋은 말을 해 달라고 당부할 정도로 훌륭한 덕을 지녔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시의 첫머리에 깎고 다듬은 듯하고 또 쪼고 간 듯하도다.[切磋琢磨]”하였다. 한나라 시대에도 사기에 이른바 기원의 대나무[淇園之竹]”라고 하였다.

 이 문장의 절차탁마는 학문하고 자기 수양하는 것으로 워낙 유명한 문장이라 대학논어에도 나온다. 논어학이편에서 공자가 자공과 문답하면서 시경을 인용하고 있다. 석재가 여농시고의 첫 페이지에 기욱여취라고 한 것은 절차탁마의 과정을 거쳐서 남은 보석이란 뜻이다.

 사군자 매난국죽은 계절의 순서를 따라 붙였다. 석재가 여농시고의 제첨에서 죽난국매의 순서로 대나무를 앞에 배치한 것은 여농의 시고가 절차탁마의 결과란 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사군자는 서재나 글방의 청아한 제물로 홀로 취하면 신골(神骨)이 맑아진다 했다.

 

. 원상유향(沅湘遺香)의 난초

 

 두 번째 그림으로 난초 잎 몇 개에 꽃대 두 개를 그리고 난초꽃을 피워 향기를 낸다. 우측 하단에 화제로 원상유향(沅湘遺香)이라 하였다.

 

 원상(沅湘)은 호남성의 원수(沅水)와 상수(湘水)를 말한다. 원상지역은 동정호가 있는 곳으로 초나라 사람 굴원(屈原, 기원전 약 340~278)이 강가를 거닐며 시를 읊조리던 곳이다. 굴원은 나는 이미 난초를 아홉 원이나 심었고, 또 혜초를 백이랑 심었네. 유이와 제거를 나누어 심었고, 두형과 방지를 섞어 심었네.”할 정도로 특히 난초와 향초를 사랑해 200여 두둑의 밭에 심었다.

 

 굴원은 초나라 회왕(懷王)을 보좌하여 삼려대부에 올랐다. 학식이 뛰어나고 창명법도(彰明法度)의 정치 주장을 하였으나 나중에 파직을 당해 원상(沅湘) 일대로 유배당했다. 현실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멱라(汨羅)강에 몸을 던졌다. 그가 썼다는 이소(離騷)』 『구장(九章)등의 저작은 언어가 아름답고 낭만적인 정서가 풍부하여 이천 여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이 낭송하고 있다. 여농은 굴원와 같이 강호를 거닐며 시를 읊조리는 애국시인이란 것이다.

 

. 동리추색(東籬秋色)의 국화

 

 세 번째 그림으로 국화 두 송이에 꽃 봉우리로 좌측상단에 동리추색(東籬秋色)이라 하였다. 이는 도연명의 <음주>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 꺾어 들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彩菊東籬下 悠然見南山]”에서 온 것이다. 국화꽃을 든 채 먼 곳을 바라보며 무아의 지경에 빠진 것이다. 번잡한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은자의 초연한 심경을 비유했다. 자신의 소박한 본성을 지키면서 전원에서 살아가는 전원시인이며 은일자였다.

 국화가 군자의 화초로 들어간 것은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꽃이다. 만물이 죽어가는 서리 앞에서 화려하게 꽃피우며 당당할 수 있는 것은 국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노란국화는 강열하고 날카롭기까지 하다. 죽음 앞에 떳떳할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 서호춘몽(西湖春夢)의 매화

 

 네번째로 오랜 고목에 새순이 돋아 가녀린 매화를 피웠다. 화제로 우측에 서호춘몽(西湖春夢)이라 하였다. 이는 서호에서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삼으며 시를 읊조리던 송나라의 임포(林逋)를 말한다.

 그는 평생을 홀아비로 살면서 세속의 영리를 버리고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유정(幽靜)하면서도 청고(淸高)하였는데, 시로써 이름이 나는 것을 싫어하여 많은 시를 버리고, 후세에 전하여질 것이 두려워 시를 읊되 기록하지 않기도 하였다. 그는 서호 근처의 고산(孤山)에 은둔하였다. 자주 호수에 나가 조각배를 띄우고 정취를 즐겼다. 임포는 처자가 없는 대신 자신이 머물고 있는 초당 주위에 수많은 매화나무를 심어 놓고 학을 기르며 살았다. 그는 학이 나는 것을 보고 손님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임포를 두고, ‘매화 아내에 학 아들을 가지고 있다(梅妻鶴子)’고 하였다. 그의 시풍은 청신 담백하여 송시(宋詩)의 선구라고 할 수도 있다. 매화시인으로 불릴 정도로 매화를 노래한 작품에 걸작이 많이 있다.

 

산원소매(山園小梅) 이수(二首)

 

衆芳搖落獨暄姸   모든 꽃 흔들려 떨어진 뒤 홀로 곱고 아름다워

占盡風情向小園   작은 동산을 향한 풍정 혼자 다 차지하네

疎影橫斜水淸淺   맑은 물 위에 그림자 비스듬히 드리우고

暗香浮動月黃昏   은은한 향기따라 달빛마저 흔들리네

霜禽欲下先偸眼   겨울새는 내리려고 먼저 몰래 주위를 둘러보고

粉蝶如知合斷魂   흰나비가 그 꽃을 안다면 깜짝 놀라고 말리라

幸有微吟可相狎   다행히 나는 시를 읊조리며 서로 친할 수 있으니

不須檀板共金尊   악기나 술 항아리도 필요 없네.

 

. 궁험심득천호일구(躳驗心得千狐一裘) 기사(己巳) 오월(五月) 석재병서(石齋竝書)

궁험심득천호일구(躳驗心得千狐一裘)”는 천 마리의 여우 겨드랑이 밑의 흰 털가죽을 모아 한 벌의 갖옷을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얻었다. 여우 천 마리를 잡아야 한 벌의 갖옷이 만들어진다,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얻었다.”는 것도 여농시고를 보면 산수를 유람하면서 남긴 시문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양산 통도사를 유람하고 <통도사팔경>으로 무풍한송(舞風寒松), 취운모종(翠雲暮鐘), 안양동대(安養東臺), 자장동천(慈藏洞天), 극락연지(極樂蓮池), 비로폭포(毘盧瀑布), 백운명고(白雲鳴鼓), 단성낙조(丹城落照)라 하고, 기이한 바위(奇局妙石)로 사자등(獅子嶝), 상왕봉(象王峰), 대마등(大馬嶝), 우미등(牛尾嶝), 우비암(牛鼻巖), 우조석(牛槽石), 삼구석(三龜石), 금와혈암(金蛙穴巖)이라 하였다. 그리고 통도사 동구 석벽에 이름을 제명하였다.

동래 범어사를 유람하고 <범어사팔경>으로 어산노송(魚山老松), 계명추월(鷄鳴秋月), 청련야우(靑蓮夜雨), 대성은수(大聖隱水), 내원모종(內院暮鐘), 금강만풍(金剛晩楓), 의상망해(義湘望海), 고당귀운(高幢歸雲)이라 하고, 세 가지 기이한 것(三奇)으로는 원효석대(元曉石臺), 암수바위(雌雄石), 닭바위 위의 황금 우물(鷄巖上金井)이라 하였다. 그리고 통도사 문밖 바위 면에 이름을 제명하였다.

달성 동화사를 유람하고 고적으로 고려 태조가 앉았던 일인석과 보조국사가 앉았던 보조대가 있고, 동화사 동구 암벽에 제명하였다.

영천 은해사를 유람하고 석두암(石竇庵), 동석대(動石臺), 활보암(活步巖), 삼인암(三印巖), 삼용암(三龍巖), 불로천(不老泉), 망월대(望月臺)7가지 기이한 것이 있고, <은해사 11>으로 錦浦長林, 瑞雲暮鐘, 東峯老松, 南橋絶壁, 寄菴瀑布, 柏旨紅葉, 雲浮影池, 立巖半空, 妙峰歸僧, 中巖夜月, 動石朝日이라하고 은해사 서쪽 바위벽면에 제명하였다. 이외에도 삼천리강산을 유람하며 몸으로 체득한 것이다.

 

결어

 석재는 여농시고에 제첨하면서 대나무, 난초, 국화, 매화의 사군자를 그리면서 대나무를 첫 번째로 배치한 것은 시경의 절차탁마하는 학문을 말하였고, 굴원의 난초, 도연명의 국화, 임포의 매화를 사군자를 사랑한 대표인물을 시대순서로 그렸다. 이는 12폭의 병풍이 되었다.

오랫동안 매난국죽으로 배치되지 않은 것은 제본하면서 잘못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는 석재가 여농의 인품과 시세계를 칭찬하는 은근히 의도한 바이다.

 

 석재 서병오의 제첨은 이외에도 1908년 양계초의 <중국혼>폄세(砭世)’라고 한 것과 1926년 재전당서포에서 간행한 <상서전소쇄관>, <주역주전쇄관>, <모시전주쇄관>이 있고, 1936년 간행한 <동국규방옥설>이 있다. <동국규방옥설>에는 국화, 매화, 대나무, 난초 순으로 제첨이 되어있다. “칠십사석옹(七十四石翁)”이라 한 것과 작품의 강약이 약한 것을 보면 돌아기시기 마지막 작품으로 보여 진다.

 

 

서병규 『 여농시고 』 1930
대나무, 난초, 국화, 매화 여농 서병규시고. 궁험심득천호일구 ( 躳驗心得千狐一裘 )
1926 년 재전당서포에서 간행한  < 상서전소쇄관 >, < 주역주전쇄관 >, < 모시전주쇄관 >
1936 년 간행한  < 동국규방옥설 >
< 동국규방옥설 > 의 국화, 매화, 대나무, 난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