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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은 나라 없는 서러움이다.

둔굴재 2024. 2. 13. 14:41

 정월 초하루를 설날이라 하고, 2월 초하룻날도 역시 설날이라 하여 민간에서는 집안 밖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영등할머니가 나오신다고 집집마다 굿을 하거나 치성을 드렸다. 모든 초하루는 설이었는지도 모른다. 논어에서도 매달의 첫날을 길월(吉月)’이라 하여 초하룻날에는 반드시 조복을 입고 임금의 조회에 참석하였다하였다. 지금도 중요한 일은 초하루에 하는 것도 그 전통일 것이다.

 1924년 발표한 윤극영 선생의 <설날> 동요는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여기서 까치설날은 일본이 강요한 양력설이고 우리설날은 전통적으로 지내 온 음력설이었다. 까치설날은 싫다는 이야기도 못하고, 고운 댕기와 새 신발을 기다리는 것은 우리 설날이다. 일본이 조선통치를 위하여 양력달력을 나누어 주면서 전통적으로 음력설을 쇠던 것을 강제하고 양력설을 쇠게 한 것을 노래하고 있다.

 

 세시풍속에 밝은 최남선 선생은 “‘은 섧다, 슬프다의 뜻으로 옛날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옛날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는 의미로도 쓰든 말이다. 설날이라 함은 기우(杞憂)하기 위하여 가만히 들어 앉았는 달이라는 뜻입니다.”하였다. 한 민족의 명절에 백성들이 왜 서러워하고, 조심하며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에는 설명이 조금 미진한 것 같다. 이는 역사가 오래되었다.

 

 역법이라는 것은 왕권국가의 상징으로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면 어김없이 역법을 바꾸어 하늘의 뜻에 따랐음을 보여준다. 하상주로부터 왕조가 바뀔 때마다 천명이 바뀌었다고 달력을 바꾸었다. 달력을 바꾸면 한 해의 시작이 달라지면서 전통문화가 오롯이 남아 있는 설날이 바뀐다. 왕조가 지키던 전통이 사라지고 새로운 문화가 발생한다.

 하은주 삼대의 정월은 각기 달랐다. 하나라는 건인(建寅)이라 하여 북두칠성의 자루가 인방(寅方)을 가리키는 달을 정월로 삼았고, 은나라는 건축(建丑)이라 하여 12월을 정월로 삼았고, 주나라는 건자(建子)라 하여 11월을 정월로 하였다. 오늘날 사용하는 음력은 하나라의 달력으로 전통적으로 수천 년 간 음력설을 쇠었다. 새해의 첫날을 설이라고 한다. 세수(歲首), 세시(歲時), 세초(歲初), 세물(歲物), 세찬(歲饌)은 모두 하나라 달력을 기준으로 첫날이고 이 첫날에 하는 절이 세배(歲拜)이다. ()는 하나라의 1년 단위이다.

 

 『시경주송(周訟)의 유객(有客)편은 주나라에 정복당한 은나라의 미자가 주나라 종묘에 제사 지내러간 모습이다. 미자는 객신으로 예물을 싣고 백마를 타고 제사 지내는 장소로 간다. 은나라 사람은 흰 것을 숭상하여 백마를 타고 갔다. 고대 중국은 나라는 멸망시켜도 백성은 죽이지 않았다. 멸망한 나라의 백성들이 모시던 신을 자신들의 지배아래 둠으로써 그들의 조상신가지 지배하고자 했다. 사실 신령은 나라처럼 멸망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망한 나라의 자손을 살려두고 그들이 정성스럽게 받는 토지신을 계속 받들게 하면서 선조에게 올리는 제사도 지속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자신들의 왕조에게 제사를 지낼 때 그들의 신령도 참가시켜 그 영들의 힘을 새로운 왕조를 위해 바치게 했다. 그래서 피정복자의 신은 정복자의 제사에 초대되어 무악 등을 헌상했다.

 다시 시경주송의 진로(振鷺)편으 보면 주나라 제사는 성스러운 장소인 벽옹(辟擁)에서 거행되었다. 피정복자 은왕조의 후손이 백로의 춤을 바치는 노래이다. 백로의 모습을 한 은나라 조상의 신령이 객신으로 제사에 참석하여 백로 춤을 춘다. 객신은 백마를 타고 제사 지내는 뜰에 나아가 항복할 때 모습을 재연하는 의례를 선보이고 백로 춤을 헌상했다. 제사에는 은나라 민족이 숭상하는 흰색을 사용했다.

 새는 조상신의 화신이며 신의 왕림했다는 계시의 표징이다. 그 새의 깃털을 손에 들고 추는 춤 가운데 만무(萬無)란 것이 있다. 시경국풍 <패풍간혜(邶風簡兮)>왼손에 피리를 쥐고 오른손에는 꿩의 깃털을 들고(左手執蘥 右手秉翟)”. 이는 관청 뜰에서 만무를 추는 모습을 노래한 모습이다. 마지막 장에는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고 늪에는 버섯이 있네. 누가 그녀를 생각하나 서쪽나라의 미인, 그 미인은 바로 서쪽나라 사람이네(山有榛 濕有笭 云誰之思 西方美人 彼美人兮 西方之人兮)”라고 노래하는데, 내용으로 보아 은나라 사람이 주나라의 제사에 객신으로 참석해 봉사하고 주나라 귀족에게 춤을 바치기도 했다.

 궁중제례악에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있다. 문무는 새의 깃털과 피리를 들고, 무무에는 방패와 도끼를 들고 춤을 춘다.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혁명적 사건을 궁중무악으로 만든 것이다. 무왕 제사에 이런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었을 것이다. 북청 사자춤은 무무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춤을 출 때 새의 깃털이나 주술도구를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새나 짐승의 모습을 하고 춤을 추었다. 주나라 종묘제사에 은나라 사람들의 자손이 객신(客神) 곧 손님 신으로 초대받아 백로 춤을 헌상하기도 했다. 이를 바라보는 은나라 백성은 주나라의 제사에 은나라 왕족이 춤을 추니 나라 없는 서러움에 눈물 흘리며 서러워했다. 동래학춤과 북청 사자춤은 시경 진로편의 상나라왕족이 주나라 조상신을 모신 종묘에서 추던 백로 춤의 전통을 계승한 축하공연이었을 조심스럽게 접근해 본다. 춤은 동물의 동작을 흉내를 내는 것으로 처음에는 신에게 바치기 위한 것이었지만 세월을 지나면서 점차 놀이와 예술로 변해간다. 거기에 익살과 교훈의 의미가 추가되면서 기예로 바뀌었다.

 

 고대에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역법을 바꾸어 자신이 천운에 따랐음을 나타냈다. 하력은 정월이 인월(寅月)이고, 은력은 정월이 축월(丑月)이고, 주력은 정원이 자월(子月)이고, 진력은 정월이 해월(亥月)이었는데, 한대 이후로는 하력을 사용하였다.

 상나라 민족은 북두칠성의 자루가 축() 방향을 가리키는 건축(建丑)이라 하여 12월을 정월로 하는 설을 쇠었는데, 왕조가 바뀐 주나라는 건자(建子)라 하여 11월을 정월로 하는 설을 쇠니 한 달 일찍 설이 왔다. 설도 설 같지가 않고, 상나라의 조상신이 아닌 주나라의 조상신의 객신이 되어 제사를 지내고, 백로 춤을 헌상하였다. 상나라 왕족은 말할 것도 없고 바라보는 백성들은 자신의 조상신을 모시지 못하니 눈물이 나고 서러울 뿐이다. 울분이나 불만을 잘못 이야기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야 목숨이라도 부지한다. 공자가 제사지낼 조상신이 아닌데 제사지내는 것은 아첨이다. 이 옳은 것을 보고도 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고 한 것은 상나라 민족이 주나라 민족의 설날에 조상신을 제사하고 춤까지 헌상한 것을 깨우치게 한 것이다. 내 조상도 아닌 남의 조상을 제사지내는 상나라 민족의 울분은 나라 없는 설움이었다.

 ‘’, ‘설날은 상나라 이후 나라 없는 서러움이 배여 있는 명칭이다. 나라 없는 서러움에 우는 울음이 설움이다. 설움이 복받쳐오는 설날이다. 민족의 영원한 설이고 민족이 찾아가야할 정체성이다. 음력설을 구정(舊正)이라 하는 것도 옳지 않다.

 

 주나라는 이민족를 통치하면서 문으로 가르치고 변화하게 하고, 덕으로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였다.(以文敎化 以德服人)’ 여기에서 문화(文化)’란 말이 나왔으며, ‘()’은 전통이고 관습이며, ‘()’은 주나라의 새로운 덕목으로 음식과 관련이 있다. 주나라는 떡국정치이다. 떡국은 덕국(德國)’으로 덕으로 다스리는 정치이다. 덕이 쌓이면 공덕(功德)이 된다. 떡국정치는 설날 쌀로 떡국을 빗어 모든 사람의 입에 맞게 하여 한 끼 식사로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주나라의 달력에 의하여 설날을 맞이하여 주나라 조상신을 모시는 풍속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떡국을 먹은 밥상과 손님이 앉았던 멍석을 정리하는 일은 음식을 얻어먹은 상나라민족이 했다. 주나라 조상신을 모시는 설날 뒷정리하는 것이 설거지이다.

 

 은나라 사람은 자신들의 도읍을 상 또는 대읍상(大邑商)이라 했으며, 은나라 사람들의 자손이 세운 송나라에서는 사당에서 부르는 노래를 상송(商頌)이라고 했다. 상송에는 하늘이 제비에게 땅으로 내려가 상을 낳게 했다(天命玄鳥 降而生商)”라고 현조설화를 노래하였고, “상읍은 아름답다(商邑翼翼)” 등으로 칭송한 대목이 있다.

주나라는 상나라를 호칭할 때 반드시 은이라 불렀다. (성할 은)은 임산부가 배를 두드리는 모습을 본뜬 글자로, 옛날에는 (오랑캐 이)와 음이 비슷했을 것이다. 주나라는 북서지방에 자리 잡은 하() 계통의 종족이었고, 은나라는 연해 지방에 자리 잡은 이() 계통의 종족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주나라는 상을 은이라 불렀다.

<조선상식문답> 최남선. 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