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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은 대흥 이씨의 발상지 ; 시조 이연계

둔굴재 2009. 8. 10. 09:54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이연계(李連桂)

- 다인에는 대흥이씨의 시조가 있다.

 

  이연계(李連桂, ?~1407)는 고려 말에 벼슬이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지내고 명나라에서는 이부상서(吏部尙書)을 받은 전주이씨 22세손이며 조선의 태조 이성계와는 6촌간이다. 고려충신 포은(圃隱), 목은(牧隱)과 함께 고려조에 충절을 지켰고 이성계 즉위 날을 당하여 하야하여 함흥으로 돌아가기를 권하였는데 조준(趙浚)의 간계로 다인 평지 마을로 귀양 왔다가 1403년(태종3년)에 충의를 가상히 여겨서 귀양을 풀어주고 대흥군에 봉했으나 고향인 충청도 대흥으로 돌아가지 않고 적지(適地)인 다인에 살았다. 고려를 지키지 못한 망국의 신하임을 자처하며 학덕을 갖추고 갈포와 베옷만을 입었다.

  1407년(태종7) 10월 13일 졸하니 본관을 전주로 하지 말고 대흥으로 하게하고 무덤에 지문과 묘갈을 쓰지 말라 하였으니 그 유지는 고려를 구하지 못한 죄인의 글을 남겨서는 안된다는 절의 정신을 일깨워 준 것이다. 묘소는 다인 사호 다기산(多崎山) 묘좌에 있으며 이때부터 자손들은 대흥으로 분적하고 공은 대흥이씨의 시조가 되니, 즉 다인은 대흥 이씨의 발상지가 된다.

  공의 부인은 개성인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都僉議) 왕영(王泳)의 딸이며,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다인 땅에서 같이 살게 하고 나머지 두 형제는 고향 충청도 대흥으로 돌아가 살게 하였다.

맏아들 손귀(孫貴)는 용주부사(龍州府使)를 역임하였고, 둘째는 손정(孫禎)인데 호가 송재(松齋)이며, 셋째 아들 손현(孫賢)은 이부시랑(吏部侍郞) 좌찬성(左贊成)이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묘갈명은 순천인 장세호(張世鎬)가 지었다.

귀양지에서 겪는 공의 기사와 저술이 적지 않을 것으로 짐작이 되지만, 채미시 한 귀절 만이 전하여오니 백이숙제의 청백함과 같다.

 

    緬想天開雨露天            멀리 주나라가 세워질 때를 생각하니,

   千秋薇蕨爲誰新            천년의 고사리 누구 위해 새 싹 돋는가.

   莫過首陽山下路            수양산 아래를 지나지 마라,

   伯夷應笑未亡人            백이가 나라 망한 사람보고 웃을 것이리라.

 

                                 다인 사호 다기산의 대흥이씨 시조 이연계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