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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최제우 아버지 근암 최옥의 문집

둔굴재 2009. 8. 30. 20:27

 

                      최옥의 근암집(近庵集), 당시에 유명인의 서문은 받지 못하였다.  둔굴재 소장.

 

 최제우의 부친 근암(近庵) 최옥은 장가를 세번 들었다. 첫번째는 근암이 17세(1778년)에 흥해 매곡에 사는 4년 위의 21세 오천 정씨(1758~1797)와 결혼하여 근암이 36세(1797년) 되던 해 병을 얻어 세상을 떳다. 아들하나를 낳았으나 곧 사망하였고 중병으로 독한 약을 많이 먹어 후사를 가질 수 없었다. 사대부가 상처하면 3년상을 치르고 나서야 재취하게 되어 있었으나 자식이 없는 근암은 1년 상을 치르고 나서 재혼 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798년 나이 37세에 25세의 달성 서씨(1773~1811)와 재혼 하였다. 불행하게도 이 서씨 부인도 장수하지 못하였다.39세의 되던 1811년 근암의 나이 50세에 젖이 곪는 병인 유방암에 걸려 참혹한 병고 끝에 딸 둘을 남기고 죽게 된다.

 이미 나이 50이 된 근암은 3형제중 맏이 였으나 재혼 할 생각을 접고 둘째 동생 규(1770~1832)의 큰아들 제환을 양자로 들여 서씨부인의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양자 제환에게 살림을 맡기고 여생을 벗들과 노닐면서 학문의 길을 정리하고 후진들을 가르칠 생각을 하였다.54세 되던 해에 두 형제와 친구에게 서사를 짖겠다는 의견을 비쳤다. 그리하여 와룡암을 수리하는 한편 그 뒤에 용담서사(龍潭書社)를 지었다.

 세번째는 근암 나이 63세에 금척리의 한모 제자가 자기 고모가 스승을 모실만하다고 천거하였다. 그리하여 제환을 찾아가서 자신들의 뜻을 밝혔다.  한모의 고모라는 분은 곡산 한씨(1793~1833)이며 경주 건천 금척리에 살고 있었다. 한씨는 일찍 시집을 갔으나 20세에 부군이 별세하여 홀몸이 되었다. 그후 친정에 와서 지낸지 10년이 넘었으므로 1824년 한씨 부인의 나이는 30세였다고 보여진다. 1824년 63세의 근암은 아들을 낳았다. 이가 최제우이다.

 경주최씨 가문에 유명한 인사가 태어나면 귀미산이 울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7대조인 정무공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1568~1636)장군이 탄생했을 때 귀미산이 울었으며,외와(畏窩) 최림(崔琳)도 탄생하자 귀미산이 세번 울었고, 수운은 세번이 아니라 3일간을 울었다 한다. 귀미산이 3일 울었다는 것은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씨부인은 수운의 아명을 "복슬이"라 지었다.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복슬이라 하였다. 복슬이라 함은 삽살개의 별명인데 집안의 귀한 동자를 부를 때 대개 복슬이라 부른다. 한자로 복술(福述)이라 쓰는데 수운 역시 최복술(崔福述)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수운의 본명은 제선(濟宣)인데 울산에서 경주로 돌아와 구도의 결심을 다질 때 이름과 자와 호를 지었다. 이름은 제우(濟愚)로 자는 성묵(性默)으로 호는 수운(水雲)으로 고쳤다.제우란 어리석은 세상을 건진다는 뜻이고 수운이란 호는 물과 구름이란 뜻으로 천지생명을 상징한 것이다. 성묵은 도가 극치에 이르면 혼혼묵묵(昏昏默默)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한다.

 최제우의 아버지 근암의 인품은 "온화하고 우아하고 학식이 넓고 고상한 군자라 일컬을 만한 사람이었다. 근암은 당대의 퇴계학파에 속한 학자로서 유학을 실천한 선비였다. 13세에 기와(畸窩) 이상원(李象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지방 향시에는 8번 나가서 다 합격하였으나 복시에는 번번이 실패하였다. 수운의 나이 17세에 근암은 79세의 일기로 생애를 마치었다. 혈육으로는 서씨소생의 딸이 2명, 한씨 부인의 소생으로 수운과 딸 한명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