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琴湖江)
금호강의 발원은 경주 모자산과 영천 보현산에서 발원하여 영천 쌍계에서 합수되어 영천 고촌천, 고경천, 신녕천, 대창천, 오목천, 경산 남천, 대구의 불로천, 동화천, 신천, 달서천을 합류하여 옛 강창나루터에서 낙동강에 유입되는 길이 116Km의 국가하천이다.
금호강(琴湖江)이란 명칭은 '금호'라는 호수와 '금호강'이 합쳐진 이름이다. 물이 흐르면 강이 되고, 물의 흐름이 멈추면 호수가 된다. 영천 금호에서는 호수가 되지만 안심 금강리에 오면 흐름이 많으면서 강이 된다.
겨울의 강은 얼음이 얼어서 흐르지 않고, 봄의 강은 얼었던 강이 녹으면서 조금씩 흐르고, 여름의 강은 장마로 불어 난 물이 기운차게 넘쳐흐르고, 가을의 강은 수량이 안정되고 맑은 호수가 된다. 드러난 뭍의 구릉지에는 갈대와 버드나무가 자란다. 차가운 이슬이 내리고 가을의 마지막 절기인 서리 내리는 상강(霜降)에는 갈대는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부비며 거문고 소리를 낸다. 갈대가 거문고 소리를 내는 가을에는 물의 흐름이 안정되어 호수가 되니 거문고 호수, '금호(琴湖)'가 된다. 거문고곡은 근심 중에도 지조를 잃지 않기 때문에 선비가 가까이하는 악기이다. 금호는 거문고 호수로 선비의 강이다.
병와 이형상은 1772년 제주도 한라산에서 고사한 단목으로 만든 거문고를 즐기며 살았다. 목민관 생활을 마치고 영천 금호강이 내려 보이는 언덕에 세상에 대한 입을 닫고 거문고만이 좋아하여 병와(甁窩)를 짓고 음악관련 아악과 속악 혹은 악장이나 사부를 수집한 <악학편고>와 <악학습령>을 저술하였으며, "내가 천고의 뜻을 가지고 아침저녘 육현과 노닌다"고 하였다. 금호는 이형상의 강이었다. 거문고 소리는 강따라 흘러가고 갈대소리와 함께 호수에 머물기도 한다. 금호는 이형상이 호칭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금호는 영천이고 금호강은 대구에 있다.
금호강은 초례봉(醮禮峰) 아래 반야월, 각산동을 흐르면서 동호(東湖)라고 불려진다. 초례봉은 의병장 황경림(黃慶霖)이 승방재(勝芳齋)를 짓고 전쟁의 공로를 더 이상 말하지 말라며 각건을 쓰고 학문을 하였다는 ‘각산사제(角山私第)’의 각산동(角山洞)이란 지명이 남아있는 곳이다.
물의 흐름이 느린 맑은 호수에는 살찐 고기들이 노니니 강태공들이 여기 저기 갈대밭에 앉아있고, 황새, 기러기, 오리, 원앙새 등의 물새들이 물을 거슬러 유영하고 물따라 날아간다.
금호가 선비의 강인 이유는 '금(琴)'은 거문고는 실로 만들어진 악기로 그 소리는 애(哀)하다. 애한 소리는 방정한 마음을 마음을 일으키고 분수를 지키고 꺾을 수 없는 뜻을 일으켜 군자가 거문고의 소리를 들으면 의(義)로움을 생각하게 된다. 실소리는 처절하여 모서리를 잘라내듯 결단을 잘하므로 사람의 마음이 방정하면 뜻이 탐욕의 유혹을 받지 않으니, 선비가 특별한 연고가 없으면 몸에서 거문고를 놓지 않기 때문이다. 거문고는 현악기로 그 소리가 맑고 은은하여 원근을 막론하고 매우 듣기가 좋다. 거문고에는 태고의 음악이 담겨있다.
대구 시지의 노변동(蘆邊洞)은 '갈변'이라하여 금호강의 큰물이 들고 나가는 곳으로 마을 주변에 갈대가 우거진 늪지대로 농사짓기도 어렵고 사람이 주거하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제방을 쌓고 물흐름이 안정되어 강 유역에는 동서로 긴 띠 모양의 금호평야가 발달 했고, 한 때는 대구, 영천, 하양, 청천, 경산 등지는 사과의 주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거문고 소리 들리는 금호
금호강은 율하동을 흘르면서 반계(磻溪)라고 불려진다. 반계는 율하동의 원래 이름으로 곡강최씨와 행주은씨의 세거지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훈련부정 회당 최응담(崔應淡. 1564~1593))의 유허지이다. 반계는 지금의 섬서성 보계현에 있는 봉상계의 이름으로 위수로 흘러든다. 위수(渭水)는 황하의 가장 큰 지류로 현 감숙성(甘肅省)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섬서성(陜西省) 위원현(渭源縣)에서 황하와 합류한다. 위수가의 반계는 강태공은 고기 잡는 것은 관심도 없고 주 문공을 만나기 위하여 세월 보내며 낚시하던 곳이다.
금포 김시성(金是聲. 1602~1676)의 강정10경에 <징파약린(澄波躍鱗)>이라 하여 금호강 맑은 물에 잉어가 뛰어오르고, 남주 채헌기의 고산팔경에도 <반계수류(磻溪垂柳)>와 <대담관어(臺潭觀魚)>라 하여 금호강 반계의 늘어진 수양버들에서 대담의 물고기를 구경하고 있다. 이름에 걸맞게 지금도 반계 근처에는 보기 좋은 수양버들 사이로 물고기가 많아 강태공의 후예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고 있다.
금호를 지나 고산지역에는 <퇴도이선생과우복정선생강학유허비>가 있는 고산서당(孤山書堂) 앞에는 팔공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금호강이 남천과 합류하여 흐르고 강둔치에는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며 반짝이며, 일엽란(一葉蘭, 일명: 고란초)이 검은 바위 벼랑에 살붙여 사는 것이 장관이다. 금호강변 고산에는 아름다운 경치만큼이나 팔경시가 둘이나 전한다.
운계(耘溪) 서석보(徐錫輔)는 《고산서당팔경》에서 팔공산의 푸른 아지랑이(北嶽靑嵐), 남천의 저녁노을(南溪晩霞), 금호의 고잡이 배(琴湖漁舶), 우산 목동의 피리소리(牛山牧笛), 능소에 노니는 물고기(菱沼游魚), 버들제의 봄 꾀꼬리(柳堤新鶯), 벼랑의 늙은 측백나무(蒼崖老柏), 모래밭에서 꿈꾸는 갈매기(平沙夢鷗)라 하였다.
《고산서당팔경》의 제3경. 금호강의 고기잡이 배(琴湖漁舶)
薄理魚舟向遠津(박리어주향원진) 고깃배 닻줄 풀어 기슭으로 내려가니
滿江蓼月日時新만강료월일시신) 그윽한 갈대밭에 달빛도 새로워라.
我歌欲和夷溪櫂(아가욕호이계도) 나는 무이구곡가로 화답하고자 하니
誰識竿頭進步人(수식간두진보인) 누가 낚싯대 가까이 나아가는가?
남주(南洲) 채헌기(蔡憲基 , 1890~ 1963)는 《고산팔경》에서 팔공산의 아지랑이(八公積嵐), 금호강의 나룻배(琴湖歸帆), 대담의 물고기 구경(臺潭觀魚), 석문에서 나그네 전송(石門送客), 반계의 수양버들(磻溪垂柳), 남쪽 하늘의 밝은 달(南天霽月), 우산의 낙조(牛山落照), 조포의 목동 피리소리(棗浦牧笛)라고 읊고 있다.
반계수류. 반계의 강태공. 2012. 5.22일
《고산팔경》의 제2경. 금호에 돛단배(琴湖歸帆)
平湖漠漠浩無邊(평호막막호무변) 넓고 아득한 호수가 넓고 넓게 흐르니,
一曲悼歌斷復連(일곡도가단복련) 한곡조의 뱃노래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네.
明月空汀何所事(명월공정하소사) 밝은 달은 빈 물가에서 무슨 일인고,
簫簫歸帆載風煙(소소귀범재풍연) 흐르는 돛단배에는 운무가 실렸네.
대구광역시의 고산(孤山) 매호동(梅湖洞)은, 북송의 임포(林逋)가 항주 고산아래 서호(西湖)에 초막을 짓고 처자도 없이 지내면서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여기며 은둔한 곳과 관련이 있다. 그는 "성긴그림자 맑은 물위에 드리우고, 은은한 향기 황혼의 달빛아래 떠도네."라는 시구를 읊은 유명한 시인이다. 이곳의 고산과 매호동도 그런 높은 뜻을 본받고 싶어 이름하였을 것이다. 고산 매호동은 매처학자(梅妻鶴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다. 임포가 좋아했던 매화와 서호로 마을 이름을 정하였다.
매호동(梅湖洞) 에서 새로 생긴 마을이 신매호동으로 현재의 신매동이다. 지금의 매호동은 매화나무가 많으며 주위에 저수지들이 산재해 있었으며, 동네 뒷산이 암소가 송아지에게 젖을 먹이는 형상이라 우산(牛山)이라 한다.
임포의 <임화정시집>. 1910년. 둔굴재 소장.
금호강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강바람이 좋은 곳마다 매운탕 집이 성업하였다. 그 중에서도 하양의 청천 유원지, 대구의 동촌유원지, 팔달교의 밤숲, 강창나루터가 유명했다.
옛날의 놀이로는 최고의 놀이인 뱃놀이를 즐길 수 있는 대구의 동촌에는 흐르는 물을 내려보기 좋은 구룡산 높은 곳에 아양루가 있다. 그러니 엄태두(嚴泰斗)가《아양팔경》을 읊었다. 금호 밝은 달(琴湖明月), 비슬산서 날아 온 구름(琵岫歸雲), 구룡산 나무꾼의 피리소리(九龍樵笛) , 팔공산의 짙은 안개(公山宿霧), 동촌의 저녁노을(東村夕照), 서쪽 절의 새벽 종소리(西寺晨鐘), 두 다리의 무지개(雙橋彩虹), 푸른 절벽의 고기잡이 배(蒼壁漁舟)라고 읊었다.
《아양팔경》의 제1경 금호의 밝은 달(琴湖明月)
琴湖不讓洞庭湖(금호불양동정호) 금호는 동정호에 뒤지지 않으니,
湖月天成別版圖(호월천성별판도) 호수와 달은 하늘이 만든 특별한 모습이네.
圖上姮娥粧玉鏡(도상항아장옥경) 그림에 항아가 옥거울로 화장한 듯,
鏡中影子暎氷壺(경중영자영빙호) 거울 속 그림자가 깨끗한 마음까지 비추네.
1930년대 대구 검사동의 동촌교
1930년대의 대구 아양교
검단 나루터가 있는 곳에는 소유정과 압로정이 있다. 송담 채응린이 을사사화를 보고 강가에 은거한 곳이다. 갈매기는 어부가 욕심이 없을 때는 갈매기가 주위에서 노닐더니, 잡으려는 마음이 생기자 갈매기가 가까이 오지 않는다는 고사에서 세상사 잊고자 한 곳이다. 노계 박인로가 소유정을 방문하고 <소유정가>를 지은 곳이기도 하다.
채응린(蔡應麟, 1529~1584)은 풍광이 뛰어 난 금호강변 왕옥산(王屋山) 기슭에 압로정과 소유정을 건립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강학소로 사용하였다. 동화천이 만나고 해안현이 마주보이는 곳이다.
채응린의 호는 송담(松潭)이지만 또 다른 호는 탄은(灘隱) 이기도 하다. 두문동 72현의 한사람인 다의당(多義堂) 채귀하(蔡貴河)의 후손이다. 압로정이 있는 곳은 지금도 검단공단의 복잡한 도시이지만 그 옛날에는 검단 나루터에 물길이 만나는 곳에 한선비가 은거하기 좋은 곳이었다. 채응린은 27세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을사사화를 보고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채필훈(蔡必勳)에 의해 압로정만이 중건되었다. <송담선생실기>가 있다.
갈매기를 벗삼고 금호강 여울에 은거한 이곳은 기암괴석의 청석이 깔려 있어 바위 벼랑 아래 금호강으로 소요유하기에 좋은 곳이다. 압로정에는 편액 외에 압로정중수기, 소유정원운과 채응린과 여러 유림들이 쓴 시문, 기문 등이 15개 걸려있다.
채필훈은 《압로정팔경》으로 팔공산으로 돌아오는 구름(公岳歸雲), 금호강을 날으는 갈매기(琴湖泛鷗), 서쪽 산으로 지는 노을(西峰落照), 동쪽 봉우리로 뜨는 달(東嶺吐月), 먼 교외의 아침에 내리는 비(遠郊朝雨), 가까운 마을의 저녁연기(近村夕煙), 군인고개에 쌓인 눈(軍峴積雪), 왕옥산의 솔바람(王屋松風)으로 설정하고 노래하였다.
소유정 아래에는 3개의 대가 있었다. 제1대는 물고기 구경하는 관어대(觀魚臺), 제2대는 ◯◯◯, 제3대는 낚시질질하는 물가로 조기(釣磯)가 있다.
채귀하의 <다의당 실기>. 채응린의<송담실기>, 채필훈의 <금와유고>, 채헌기의 <남주집>. 둔굴재 소장.
압로정 편액
소유정 편액
금호로 내려가는 청석 오솔길
압로정에서 바라 본 인천채씨 사선생 서산원
노곡동 금호강가에 금호진(琴湖津)이 있어서 달구벌 사람들은 서울나드리라 하였고, 나루터에는 금호진 주막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서울나드리 주막이라 불렀다. 노곡동에는 금호강 참(站)이 있어서 관리들이 식사나 숙박을 제공받기도 하고 우편업무도 맡아서 하였다.
침산에서 서쪽으로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달구벌과 수성벌 사이를 흐르는 샛강(신천)은 침산 아래에 와서 금호와 마주하면서 하얀 모래톱을 만들어 백사벌(白沙伐)을 이룬다. 백사벌에는 침산의 빨래돌을 주워 빨래터를 만들어 빨래하는 아낙네들로 가득하였고, 물새들이 새끼치기 좋은 곳이라 아이들은 새알 주으러 가는 곳이다.
강 서쪽으로 노을이 붉게 물들면 빨래하는 아낙네들은 저녁짓기 늦을까봐 종종 걸음이 바빠진다. 이 때 시인은 시를 읊어야 한다. 서거정의 달성 십경중에서 <침산의 석양(砧山晩照)>이다.
水白西流山盡頭(수백서류산진두) 물은 서로 흘러 산 밑에 닿고,
砧巒蒼翠屬淸秋(침산창취속청추) 침산의 푸르름 가을 정취 더하네.
晩風何處舂聲急(만풍하처용성곡) 저녁바람 어디에서 방아소리는 급하고,
一任斜陽搗客愁(일임사양도객수) 노을에 젖은 나그네 수심 찧는다네.
정사철의 <임하집>, 정광천의 <낙애집>, 정사화의 <백치집>, 도신여의<휘헌집>. 둔굴재 소장.
조백승의 <임거일고>, <도천세고>. 둔굴재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