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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농시고』의 석재 서병오의 사군자 제첨

畬農詩稿 徐丙奎 著. -鉛活字本. - 1930년. 2卷 2冊 : 圖 : 28.8 19.5 cm. -東裝. -四周雙邊, 半郭 21.7 14.4 cm., 有界, 11行28字, 註雙行, 上黑魚尾. 自序: 己巳(1929)...徐丙奎. 여농 서병규(徐丙奎)의 아호 여농(畬農)은 『역경』 무망괘 62효사에 “밭 갈지 않고 심지 않아도 수확이 있으며, 밭을 바꾸고 휴경하지 않아도 지력을 회복한다. 이와 같이 밖으로 나가면 당연히 이로움이 있다.”하였다. 『이아』 석지(釋地)에 따르면 “밭이 1년 된 것을 치(菑)라 하고, 2년 된 것을 신전(新田), 3년 된 것을 여(畬)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치여(菑畬)는 농사용어다. 고대의 농사법에 치(菑)는 불을 놓아 당년에 개간하여 묵혀놓은 묵정밭이고, 새밭은 다음해부터 ..

카테고리 없음 2024.02.01

조구령(曺九齡)과 대부교비(大夫橋碑)

[屯說] 김해에 있는 대부교는 김해지역과 죽도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죽도는 당시 무인도였지만 전쟁에 쓰이는 전함과 배로 실어 나르는 곡식을 쌓아두는 곳간인 조창이 있어서 다리가 없이 출입하는 주민들이 불편해 하였다. 김해부사 황호(黃鎬)가 을유년에 석재로 다리를 축조하고 김해지역의 문장가 정옹 조구령이 사실을 을 지었다. 김해부 남쪽으로 5리쯤에 ‘대부(大夫)’라는 포구가 있는데, 그렇게 이름을 붙인 의미는 전하지 않지만, 어쩌면 ‘복야파(僕射坡)’나 ‘낭관호(郞官湖)’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나무를 베어다 다리를 만들어 죽도와 통하게 하였는데, 죽도는 곧 전함(戰艦)을 보관하고 조창(漕倉)을 설치해 둔 곳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날로 이어지는데, 비바람에 썩어 무너져 몇 년에 한 번씩 개수하니,..

카테고리 없음 2024.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