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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의 전가보물 ‘소(素)’

안동김씨가 처음 터를 잡은 곳은 태사공 이후 안동부내 수남 강정촌(江亭村)이다. 지금의 귀래정 자리로 추정한다. 그 후 풍산현 불정촌(佛頂村)에 옮겨 살았다. 지금의 풍산현 시장 오른쪽 수곡이다. 지금의 소산 마을에 정착하게된 것은 비안현감 김삼근(金三近, 1419~1465)이 둘째 아들 김계행(1430~1517)이 출생한 이후에 옮겨와 살면서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금산촌(金山村)이라고 하였다. 이 때에 돈소당이란 당호도 사용하게 되었다. 돈소당 뒷산은 표고 100m 정도의 구릉으로 금산(金山)으로 불리어졌으나,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병자호란으로 낙향하여 “김가(金哥)가 사는 곳을 금산이라 하면 이는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모름지기 검소하다는 소산(素山)으..

카테고리 없음 2022.08.26

팔공산

팔공산의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부악(父岳)이었다. 그 후 신라가 한강지역까지 국토가 확장되면서 나라의 중앙에 가깝다고 중악(中岳)이라 하였고, 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을 설치하면서 중요한 산이어서 공산(公山)이라 하였다. 고려 때까지는 계속 공산으로 불려 지다가 어느 시점에 팔공산이라 불려 지게 되었다. 팔공산으로 불려 지게 된 사유를 설명하는 것은 대략 세 가지가 있다. 여덟 고을에 걸쳐있다고 팔공산이라 한다하였다. 이는 1905년 의흥현감 조병유(趙秉瑜)가 팔공산 파계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승려 극암사성(克庵師誠, 1836~1910)의 『극암집』 서문에서 “왼쪽으로는 금호강을 끼고 오른 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며, 여덟 고을에 걸쳐 수많은 봉우리들이 늘어서 있으니 기세가 웅장하..

카테고리 없음 2022.07.26

중산재

중산재는 경산시 계양동 북부동사무소 앞에 있었으며, 팔하 서석지의 아들 서경순(徐耕淳, 1840~?)의 서재이름이다. 회산 박기돈의 글씨를 판각하여 녹당채색으로 마감하였다. 글씨의 획수가 적은 글씨를 조화롭게 썼다. 현판의 테두리에는 아자문(亞字文) 장식이 있다. 중산은 문우관 진덕문(進德門) 편액도 썼으며 부친의 서예 이론서 을 1917년 편집발행하였다.

카테고리 없음 2021.11.26